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이적단체 규정 검토' 지시에 이어 최근 새로 선출된 제11기 한총련 지도부가 '적극 호응' 방침을 밝히면서 '한총련 합법화' 문제가 관심사로 떠올랐다. 그동안의 경과와 쟁점을 살펴본다. ◇ 경과 = 지난 93년 전대협을 전신으로 '생활. 학문. 투쟁의 공동체'를 표방하며 출범한 한총련은 96년 8월 '연세대 사태'와 97년 6월 한양대 이석씨 치사 사건 등을 겪으면서 사회적 논란의 대상이 됐다. 검찰은 93년 출범 직후부터 한총련 산하 조국통일위원회(조통위) 등에 대한 이적단체 규정을 검토하다 연세대 사태 이후 조통위와 정책위, 범청학련 남측본부 등을 이적단체로 규정했다. 97년 5기 한총련의 이석씨 치사 사건 이후에는 같은해 6월 한총련 전체를 이적단체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대법원도 98년 8월 5기 한총련 의장 강위원(30)씨 사건 판결에서 "한총련은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노선과 활동을 찬양. 고무하고 동조하는 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라고 규정했다. 이후 경찰이 한총련 대의원대회와 출범식을 원천 봉쇄하고 한총련 탈퇴서를 쓰지 않은 대학교 총학생회장 등을 이적단체 구성원으로 자동 수배하는 일이 매년 되풀이됐다. 법원은 6-7기 한총련에 대해 '한총련 구성원이 매년 바뀌긴 하지만 연방제 강령이 유지되고 있는 등 5기와 달리 볼 근거가 없다'며 검경의 조치를 사후 추인했다. 중대 변화의 계기는 2001년 출범한 9기 한총련이 강령중 '연방제' 부분을 '6.15남북공동선언'으로 바꾸면서부터. 적어도 9기 한총련부터는 이적단체 규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부 법률검토까지 거쳐 취한 조치였지만 검찰은 '반미나 국가보안법 철폐 등은 북한 주장을 추종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급기야 한총련은 2002년 10기 출범 당시 강령 중 '미국을 반대하고'라는 부분도'미국을 비롯한 외세의 부당한 정치, 군사, 경제, 문화 등의 지배와 간섭을 막아내고'로 바꾼 뒤 이적단체 규정 해제를 요구했다. 외부적으로도 미군 장갑차 여중생압사 사고와 촛불시위 이후 '반미=용공'이라는 기존의 보수적 도식에 대한 문제의식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이런 상황에서 노 대통령의 지시가 나왔고 한총련은 이를 '7년의 인고 끝에 찾아온 기회'로 보고 '(민중민주파와 비운동권 등을 포괄하는) 새 조직으로의 변화 모색'까지 내세우며 호응하고 나왔다. ◇ 쟁점 = 범민련이나 범청학련 등과 달리 유독 한총련 합법화 논란이 집중 제기되는 것은 한총련이 매년 대의원이 바뀌는 대중조직이라는 점 때문. 한총련 지도부와 생각이 다르더라도 따로 탈퇴서를 쓰지 않는 한 이적단체 구성원으로 자동 수배되는 게 현실이다. 검경이 수많은 대학생을 포괄하는 대중조직을 이적단체로 규정할 수 있었던 것은 95년 연세대 사태.97년 한양대 이석씨 치사 사건 등을 계기로 확산된 '한총련은 폭력 집단, 북한 추종 세력'이라는 당시 인식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문제는 외양상 대중조직인 한총련을 대다수 대학생의 생각이 끊임없이 바뀌는데도 불구, 일부 정파가 줄곧 장악할 수 있었던 내부의 비민주적 구조에도 있는 셈이다. 학생운동 전문가들은 의장 선출시 위임장 투표, 간부의 자기 추천, 6개월여에 걸친 임시 한총련 체제 등을 문제점으로 지목하고 있다. 한총련 내부적으로도 그동안 노력에도 불구, '한총련'이라는 이름의 단체로는 이같은 국민의 의심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판단이 확산되면서 '검경의 탄압'을 빌미로 일부 정당화돼온 비민주적 조직 운영을 개선하기 위해 규약 개정을 논의 중이다. 국민들의 의심이 여전한 게 사실이지만 이런 내부 민주화 노력을 가속화하기 위해서라도 대학생들에게 기회를 줄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는 것도 이 대목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학생운동 전문가는 "지난 7년의 세월은 과거 한총련의 행태를 돌이켜볼 때 불가피했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며 "하지만 탄압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는 만큼 대다수 대학생의 건강한 정신을 믿고 (한총련의) 민주화 기회를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이충원기자 chungwo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