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머니의 태중에서 막 빠져나올 때 무슨색을 가장 먼저 보았을까. 그것은 빨강이었다. 이 색깔은 지금도 무의식 속에 살아숨쉬고 있다. 빨강에 담긴 의미는 무척 많다. 신성, 으뜸, 벽사, 기원, 열정, 사랑, 생명, 생산 등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 무엇보다 빨강은 색깔의 제왕이다. 삼원색(빨강 노랑파랑) 중 으뜸이 빨강이요, 일곱 가지 무지개색 중 맨 앞자리가 바로 빨강이다. 그래서일까. 한국과 일본, 중국 국기는 모두 빨간색을 갖고 있다. 대만, 베트남,미국, 프랑스, 독일 등 국기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색깔 또한 빨간색이다. 한국축구 대표팀 응원단인 '붉은 악마'가 빨간색을 택한 것은 우연일까. 그럴수도 있다. 아무튼 한반도를 신들리게 하고 있는 빨간색의 신출귀몰한 조화는 예사로운 일이 아닌 듯싶다. 주술의 기운까지 가세한 것같기 때문이다. 빨강에 담긴 의미를 살펴보자. ▲으뜸과 신성 태초에 빨강이 있었다. 그것은 태양의 빛이었다. 어둠에서 세상을 해방시켜주는것은 동녘에서 솟아오르는 불덩어리같은 빨강이었다. 그래서 빨강은 으뜸자리를 차지했고, 신성함의 상징으로 군림했다. 붉은색은 황제를 의미했다. 궁전과 옥좌는 붉게 칠했고, 황제의 의상도 붉은색이었다. 천주교 교황과 주교들도 빨강 모자를 써 신성함과 권위를 나타냈다. 세속에서도 빨간 옷을 입을 수 있는 계층은 귀족 이상의 신분이어야 했으며 평민이 이 신성불가침의 색깔로 차려입었다가는 목숨 부지하기가 어려웠다. ▲벽사와 기원 붉은색은 신성하기 때문에 악귀를 몰아내는 신통력을 가졌다고 사람들은 믿었다.동짓날 팥죽을 쑤어먹고 서원이나 향교 앞에 홍살문을 두는 이유가 그것이다. 부적색깔이 빨간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귀신은 붉은색을 싫어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교통신호에서 빨간색은 오지 말라는 뜻이다. 빨간불이 켜진 이 시간부터 당신이 건너려는 길에는 사고위험이라는 악귀가 있으므로 멈추라는 메시지다. 계기고장 때자동차의 비상등이 붉게 들어오는 까닭도 위험하니 조심하라는 뜻이다. 아들을 낳았을 때 빨간 고추의 금줄을 건 데도 벽사와 기원의 뜻이 담겼다. 출산 침대보가 빨간색인 것 역시 같은 이유다. 동화 속의 소녀는 빨간 모자를 쓰고 있기 마련인데, 이는 사악한 늑대로부터 보호한다는 의미가 숨어 있다. 축구 주심이레드 카드를 내미는 것은 "악귀처럼 나쁜 짓을 했으니 나가라"는 선언이다. ▲열정과 사랑 빨간색에서 가장 쉽게 떠오르는 이미지가 바로 열정과 사랑이다. 애정을 표시할때 붉은 장미꽃을 선사하곤 한다. 사실 빨간색은 매우 자극적이다. 스페인 투우사들이 빨간 천을 흔드는 것은 황소보다 이를 구경하는 군중을 흥분시키기 위해서다. 신방에 청사초롱은 왜 켤까. 혼례에서 사용되는 청사초롱은 붉은 비단과 푸른비단을 씌우는 것으로 음양합덕을 기원했다. 젊은이들의 하트 모양 선물도 빨간색을 하고 있다. 빨강의 이미지는 광고에도 적용된다. 코카콜라는 빨간색으로 감각적이고 젊은 음료임을 드러내며, 담배회사도 빨간색 포장으로 손님을 끌어들인다. 권투선수의 장갑이 빨강인 것도 역동적 열정에 호소하기 위해서다. ▲생명과 죽음 빨간색은 생명과 죽음이라는 역설을 동시에 담는다.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불가(佛家)에서는 삶과 죽음이 본디 하나라고 가르친다. 생명 애착과 죽음 초월의 소망을 동시에 겨냥한다. 독일에는 '오늘은 빨강, 내일은 죽음'이라는 속담이 있다. 살아 있는 현실을 색깔로 나타낸 것이다. 붉은 피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도 여겼다. 종교의식에서 붉은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마시는 이유도 그렇다. 교회는 생명의 제물로 희생양을바쳐왔는데, 이는 동서고금이 비슷하다. 빨강은 동시에 죽음을 의미한다. 독립투사들이 거사에 앞서 단지의 글씨로 굳은의지를 나타낸다. 노동자들이 파업 때 붉은 띠를 머리에 두르는 것도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겠다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호적에 빨간줄이 그어지고, 법관은 빨간 잉크로 사형판결문에 서명한다. ▲환희와 행운 빨간색을 사용하면 행운이 온다는 게 또한 정설이다. 한국축구팀이 승승장구하는 이유도 붉은 악마의 응원 덕분인지 모르겠다. 중국 음식점의 실내 색깔도 대부분빨강이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설날에 빨간 띠에 황금 글씨로 새해의 행운을 빈다.아이들은 돈이 든 빨간 봉투를 선물받는다. 보통 때도 빨간 옷을 자주 입히고 결혼식 때는 더더욱 빨간색을 사용한다. 서양도 같은 이유로 붉은 색을 선호했다. 고대 로마에서 신부는 빨간 베일을 썼다. 크리스마스 때 오는 산타 할아버지 역시 빨간 외투를 입고 있지 않은가. 달력에 휴일을빨간색으로 표시한 것도 쉬기 때문에 기쁘다는 환희의 의미를 담고 있다. ▲빨강과 파랑 빨강과 가장 잘 어울리는 색깔은 파랑이다. 두 색깔은 양(陽)과 음(陰)이라는 동양사상에 부합되기도 한다. 해가 솟구치는 아침의 동해안이나 반대로 해가 떨어지는 저녁의 서해안을 상상해보라. 붉은 태양과 푸른 바다는 우주의 신묘한 조화다. 앞에서 말한 청사초롱은 두 색깔로 이뤄졌다. 태극기 역시 빨강과 파랑의 궁합이 절묘하다. 교통순찰차는 지붕에 한일(一)자로 얹어진 경광등의 빨강과 파랑의 불빛을 교대로 밝히며 거리를 달린다. ▲빨강과 그 뒤틀림 다의적 배경을 지닌 빨간색은 획일사회에서 억울하게 피해를 봐야 했다. 이를테면 '색화(色禍)'인 셈이다. 사회주의 국가가 빨강을 상징색으로 사용하면서 우리 사회에서는 금기의 색깔이 돼버렸다. 미술대학 수업에서도 화면에 빨간색을 60% 이상쓰면 안된다고 한때 가르쳤다. 그러나 냉정히 살펴보자. 사회주의의 상징처럼 돼 있는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은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불렸던 이름이다. 대통령이 국빈을 영접할 때 붉은 색 양탄자 위에서 사열을 받으면서도 붉은색에 대한 거부감은 매우 컸다.그만큼 사회적 가치가 뒤틀려 있었다는 뜻이다. 이번 월드컵 대회는 뒤틀림을 일거에 해소해 빨간색을 명예회복시켰다는 점에서 또다른 의미가 있다. 그동안의 억눌림을 한꺼번에 풀려는 듯 너무 빨개서 탈이라는지적도 일부 있지만, 작용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보면 크게 이상할 것도 없겠다.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id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