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스승의 날 (15일)에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는 경복고등학교
김창기(64) 교사.

수학선생님으로 교편을 잡은 지 올해로 꼭 40년째인 김교사는 일명
"교포 교사"로 통한다.

능력이 있는데도 교감이나 교장이란 감투를 포기하고 평생을 평교사로
보내기 때문에 붙여지는 별칭이다.

"소방차"라는 별명도 있다.

소방차가 달려오듯이 수업종이 땡 울리자마자 교실에 들어선다는 것.

수업시간에 커다란 칠판을 보통 두세번씩 채워 "공포의 필기맨"으로도
불린다.

또 20년전부터 지금까지 근무하는 학교마다 희망학생들을 모아 무료
새벽특강을 하고 있어 요즘에는 "노익장"을 과시(?)한다는 시샘도 받는다.

그는 "정년퇴직을 해도 학교에서 기회만 준다면 무료 새벽특강을
계속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야말로 교직을 천직으로 여기고 살아온 우리시대의 진정한 스승의
모습을 엿보게 하는 얘기다.

김교사는 말썽꾸러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했을 정도였던 "김영수"라는
제자를 감화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 80년 1년을 휴학하고 복학한 김영수군은 학교에서 유명한 싸움꾼
이었다.

학교선생님들이 수십차례 타이르며 바른 길로 인도하려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심지어 정신질환증세를 흉내내며 옷을 찢고 학교기물을 부수고 해
선생님들도 마주치기를 피할 정도였다.

그를 퇴학시키려는 논의가 여러번 있었다.

김교사는 영수가 정신병이 있는게 아니라 주위에서 그렇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매일 면담과 가정방문을 통해 그를 설득했다.

특히 퇴학서류가 교장실로 올라갔을 때는 "교직을 걸고 그를 살려
보겠다"고 간청해 불상사를 막았다.

이같은 정성에 감복한 영수는 이후 아무런 말썽없이 학교를 졸업했고
그 연유로 부모들은 아직도 김교사를 "영수의 제2아버지"라고 부른다.

당시 문제학생은 지난 87년 신부감을 데리고 김교사를 찾아와 성실하게
살겠다며 땅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올려 스승을 기쁘게 하기도 했다.

김교사의 제자인 대법원 임성규 판사는 김교사를 "가장 존경하는 스승"
이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임판사는 "그야말로 제자를 위해 젊음을 바치신 위대하신 분"이라며
"공부 뿐만 아니라 어려울 때도 도움을 많이 주신 잊을수 없는 은사님"
이라고 회상했다.

김교사는 항상 학생들 곁에 있었다.

매일 방과후에도 학교 도서관 열람실에서 학생들에게 학습지도를 해주고
불우한 학생들을 선정해 등록금과 보충수업비를 대주기도 했다.

김교사는 팔순이 넘은 친어머니(86)와 장모(83)를 모시고 산다.

그러면서도 불우한 노인들을 집에 모시고 오거나 직접 가서 돌보는
이웃사랑을 실천한다.

이들은 치매를 앓고 있어 자식들도 찾지않는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한번은 오갈데 없어 돌보던 김석교 할머니가 세상을 떠 화장을 하고
있던 중 할머니의 막내아들이 나타나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뜻을 전한
경우도 있었다.

이런 그에게 내린 축복이라면 2남1녀의 자랑스런 자녀들.

큰아들은 서울공대를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딴 뒤 한국전자연구통신연구소
(ETRI) 수석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큰 딸은 서울사대를 나와 창덕여중 과학교사로 재직중이고 둘째아들은
연대 치대를 졸업하고 현재 세브란스병원 레지던트로 있다.

김교사는 큰 딸이 의대를 가겠다고 했으나 자식중에 선생님 한명은
만들고 싶어 교직을 권했다고 한다.

정년을 1년 남짓 남겨둔 그는 스승상을 이렇게 말한다.

"애들 손잡고 가르치는게 선생입니다"

< 한은구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