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구 63스퀘어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아파트 모습. /연합뉴스
영등포구 63스퀘어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아파트 모습. /연합뉴스
한달 뒤 결혼 예정인 대기업 사내커플인 유모 씨(33) 부부는 결혼식을 앞두고 당분간 혼인신고를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청약 당첨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유 씨 부부는 모두 무주택자지만 신혼부부 특공이나 생애최초 특공을 노리기 보단 각각 청약통장을 모두 써 당첨 확률을 높이자는 데 뜻을 모았다.

유씨는 “청약이 거의 로또 수준이라 청약통장을 하나만 가지고 있는 것 보단 두 개인 것이 가능성이 높지 않겠냐”고 말했다. 유씨는 최근 나온 과천 지식정보타운을 비롯해 추첨으로 당첨자를 뽑는 중형 아파트에 집중적으로 통장을 넣고 있다.

‘내 집 마련’을 위해 혼인신고를 미루는 부부가 증가하고 있다. 부동산을 많이 소유하고 있어 절세나 자산관리를 하려고 혼인신고를 늦추는 경우도 있지만, 청약을 받고자 하는 부부들도 혼인신고를 미루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별공급이든 일반공급이든 청약 자체가 로또가 돼 당첨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더 높이기 위한 ‘내 집 마련’ 목적의 혼인신고 지연 사례가 늘고 있다.

특공 경쟁률 세자릿수…"당첨 확률 낮아"

최근 경기도 과천 지식정보타운에서 분양한 3개 단지의 신혼부부 특공 경쟁률을 본 이모 씨(34) 커플도 특공을 포기하기로 했다. 평균 특공 경쟁률이 낮게는 124대 1, 높게는 160대 1로 세 자릿수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 씨 커플은 내년 초 결혼을 하더라도 혼인신고를 무기한 늦출 예정이다. 이 씨는 “수도권 분양 단지들을 보니 특별공급도 경쟁률이 너무 높아 일반공급만큼이나 가능성이 희박해 보였다”며 “어차피 100 대 1을 넘어선 후 경쟁률은 높고 낮음이 의미가 없다고 봐 차라리 통장을 둘 다 쓰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했다”고 말했다.
부동산 공인중개업소 전경. /뉴스1
부동산 공인중개업소 전경. /뉴스1
12일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과천 지식정보타운 세 단지 특별공급에만 청약통장 9만1441개가 꽂혔다. 생애최초 특별공급은 세 자릿수 경쟁률을 기록했고 면적에 따라 최고 448대1 경쟁률을 보인 곳도 나왔다. 과천 푸르지오 어울림 라비엔오의 경우 전체 지원자의 절반(52%)가량이 생애최초 특공 지원자(1만6070명)였다. 신혼부부 특별공급도 생애 최초 특공 만큼 경쟁률이 치열했다. 과천 르센토 데시앙(161.4대 1), 과천 푸르지오 어울림 라비엔오(140.5대 1), 과천 푸르지오 오르투스(125.8대 1) 등 세 단지 모두 세자릿수 경쟁률을 보였다.

과천의 한 중개업소 대표는 “과거엔 청약을 노리는 신혼부부들이 혼인신고를 미루는 이유가 최장 7년인 신혼부부 특별공급 대상 기간을 최대한 늦추는 것이었지만 최근엔 청약통장을 잃지 않기 위해 혼인신고를 안하는 경우가 많다”며 “특공이든 일반공급이든 경쟁률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크게 과열되면서 가점으로는 승산이 없겠다고 봐 차라리 추첨제에 기대를 거는 것”이라고 전했다.

외국계 기업에 다니는 김모 씨(36)도 올 초 결혼식을 올렸지만 아직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다. 김 씨와 그의 아내가 결혼 전부터 서울 마포구와 경기도에 각각 아파트 한 채씩을 소유하고 있어 혼인신고를 하면 1가구 2주택자가 되기 때문이다. 결혼으로 1가구 2주택자가 되면 5년 이내에 집을 처분해야 양도소득세 경감 혜택을 받을 수 있는데, 김 씨네 부부는 집을 5년 안에 팔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 봤다. 각자 갖고 있는 청약통장도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김 씨는 “앞으로 집값이 더 오를 것 같아 섣불리 처분 계획을 세우기 힘들다고 봤다”고 했다.

대출도 부부보단 싱글이 유리?

청약을 포기하고 매매를 택한 부부들도 혼인신고를 미루기는 마찬가지다. 주로 대출규제를 피하기 위한 사례가 대부분이다. 의류 디자이너로 일하는 한모 씨(34)는 결혼한 지 1년이 넘었는데, 아직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있다. 서울 관악구에서 아파트 전세를 살고 있는 한 씨 부부는 미혼 상태로 보금자리론을 받아 외곽 지역에서 값이 저렴한 구축 아파트를 살 생각이다. 정부 정책자금대출인 보금자리대출은 1인 기준 소득한도가 7000만원이지만 부부일 때 8500만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한 씨는 “남편과 맞벌이를 하고 있어 부부 합산 기준을 적용받을 경우 대출을 받을 수 없다”며 “어차피 청약도 당첨 가능성이 낮다고 봐 대출금을 보태 집을 사려한다”고 말했다.
한 금융소비자가 은행 창구에서 대출 상담을 받고 있다.  /사진=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
한 금융소비자가 은행 창구에서 대출 상담을 받고 있다. /사진=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
자금이 부족한 신혼부부가 대출 한도를 늘리기 위해 혼인신고를 미루는 사례는 또 있다. 자금이 부족한 일부 신혼부부는 신랑이 갭투자로 산 집에 신부가 전세로 들어가는 웃지 못할 `편법`까지 동원하고 있다.

최근 결혼해 성동구에 신혼집을 마련한 한 부부도 혼인 신고를 잠시 미뤘다. 부부 중 남편이 전세를 안고 아파트를 매입한 뒤 법적으로 남남인 ‘아내’에게 은행에서 전세금의 80%인 4억8000만원을 대출받아 함께 입주했다. 이들 부부는 “당초 은행에서 주택담보대출을 받아 아파트를 매입할 계획이었지만 대출 규제가 강화되면서 자금을 맞출 수가 없었다”며 “담보대출은 원금과 이자를 함께 상환하는 조건이지만 전세 대출은 거치 기간엔 이자만 갚으면 되기 때문에 생활에도 더 유리하다”고 털어놨다.

안혜원 한경닷컴 기자 an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