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연합뉴스
“2년이나 사업을 막다가 이제 와 공공재개발을 하라고 거드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

이번에 공공재개발을 신청한 서울 어느 지역 주민의 푸념입니다. 이곳은 몇 년 전부터 재개발을 하기 위해 주민 동의서를 걷었던 곳입니다. 정부가 돕겠다는 공공재개발의 개념이 등장하기 전부터 말이죠.

재개발사업을 위해선 여러 가지 행정 절차가 필요합니다. 우선 주변 지역에 대한 기본계획을 수립한 뒤 정비구역으로 지정합니다. 여기까지가 관청의 몫이고 이후부턴 주민들이 추진위원회와 조합을 꾸려 끌고 나가야 하죠.

그런데 첫 단추나 마찬가지인 정비구역 지정 방식은 과거와 많이 달라졌습니다. 뉴타운 개발이 한창이던 시절엔 서울시에서 주도적으로 지정했죠. 하지만 박원순 전 시장의 ‘뉴타운 출구전략’과 맞물리면서 주민들이 먼저 구역지정을 신청해야 심사를 거쳐 지정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걸 주민입안제안이라고 합니다.

주민입안제안도 조건이 있습니다. 추진위나 조합을 결성할 때처럼 일정 비율 주민들의 동의가 필요한 거죠. 땅이나 건물 소유주들을 말하는 토지등소유자 60%가 동의해야 합니다. 그런데 토지 면적 기준도 있습니다. 동의한 사람들의 지분 면적을 다 합쳤을 때 전체 대상지 면적의 50%를 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머릿수로는 동의율을 채웠어도 큰 땅을 갖고 있는 주민들 몇몇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아예 요건을 갖추지 못할 수도 있는 거죠.

그런데 재개발을 하려는 지역의 땅을 우리 같은 개인들만 갖고 있을까요. 국가나 지자체, 행정청 등이 갖고 있는 땅도 많습니다. 이걸 국공유지라고 하죠. 대부분 국공유지는 조합이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무상으로 양도를 받았다가 향후 주민 시설 등을 지어 기부채납 하는 방식으로 돌려줍니다.

하지만 국공유지의 면적이 넓고 소유주인 행정청 등이 사업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토지 면적 기준 동의율을 충족하기 힘들겠죠. 그렇다면 조합설립은커녕 정비구역 지정부터 힘들어집니다.

앞서 말씀드린 공공재개발 신청 구역이 이 같은 경우입니다. 이곳은 사업 면적 약 4만5000㎡ 가운데 1만2000㎡가량이 국공유지입니다. 국공유지의 비율이 전체의 26% 정도로 높은 편이죠. 그런데 입안제안을 위한 동의서를 걷는 과정에서 이 땅을 가진 국토교통부와 기획재정부, 서울시, 구청 등이 동의하지 않아 애를 먹었다는 게 주민들의 하소연입니다. 2년이나 걸린 끝에 겨우 토지 면적 동의율 50%를 넘겨 구역지정을 신청했는데 이제 와 정부에서 공공재개발을 내밀며 개발을 권장하니 황당할 노릇이죠.

이와 유사한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은 추진위나 조합설립 단계에서 발생하죠. 신수동에 들어선 신촌숲아이파크(신수1구역 재개발)의 경우엔 소송으로 대법원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당시 재판부는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행정청 등이 명시적인 반대 의사를 표시한 게 아니라면 동의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봤는데요. 바로 이 ‘명시적인 반대’라는 대목이 재미있습니다. 행정청 등이 정비사업에 반대를 해도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죠. 개발이 끝나면 돌려받을 땅이지만 사업 진행을 막을 수는 있다는 것이니까요.

이번 사례는 추진위나 조합 구성이 아니라 정비구역 지정 신청 단계에서 발생했고, 또 명시적인 반대가 있었기 때문에 이례적입니다. 정비사업을 전문으로 다루는 변호사들은 행정청이 재개발 억제 기조를 유지하느라 자가당착에 빠졌다고 지적합니다. 해당 지역의 기본계획, 그러니까 재개발을 위한 밑그림을 그려놓고 정작 자신들이 반대한 꼴이 됐으니까요. 그러다 다시 공공재개발을 하라며 주민들을 찾아가 설득한다니,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죠. 집값을 잡기 위해 빨리 서울 도심에 공급을 늘려야 한다는 위기감이 들지 않았다면 태도가 이렇게 돌변하지도 않았겠죠. ‘뉴타운 출구전략에 대한 출구전략’인 셈입니다. 농사 지을 논밭은 10년 새 황무지가 됐지만요.

전형진 기자 withmol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