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부동산중개업소에서 관계자가 계약된 전세 물건이 표시된 안내문을 떼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의 한 부동산중개업소에서 관계자가 계약된 전세 물건이 표시된 안내문을 떼고 있다. /연합뉴스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에 사는 30대 초반 신혼부부 A씨는 지난 8월 전세 낀 매물을 샀다. 지금껏 작은 투룸 오피스텔에 살았지만 4개월 된 아이가 있어 아파트로 이사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주택 매수 당시 나가겠다고 했던 세입자가 9월 들어 갑자기 말을 바꿨다. 이 세입자가 계약갱신권을 행사해 2년을 더 거주하겠다고 알려오면서 A씨는 다시 오피스텔을 전전해야할 상황에 놓였다.

A씨는 "정부가 전세 만기가 몇 달 안 남은 집을 산 경우 이 집에 거주하던 세입자는 계약갱신권을 쓸 수 있다고 유권해석을 내리자 세입자가 돌변했다“며 ”이미 오피스텔 전세금 중 일부를 받아 아파트 중도금을 납부한 상황인데 계획이 틀어져 정신적 피해가 상당하다"고 하소연했다.(김은혜 국민의힘 의원의 '임대차 분쟁 피해 호소 사례 모음' 중 한 사례)

"내 집인데 내가 못 들어가"

24일 부동산업계에 따르면 세입자의 ‘2+2년’ 거주 권리를 보장한 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이 시행된 지 한 달 넘도록 혼란을 거듭하면서 실거주 매수자들이 엉뚱한 피해를 입고 있다. 당초 개정안에서도 집주인이 실거주를 위해 들어가겠다고 하면 세입자가 계약 갱신권을 행사할 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전세 만기가 몇 달 안 남은 집을 매수해 입주를 앞두고 사람들은 이같은 실거주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해석이 나오면서 새 집주인들은 혼란에 빠졌다.
서울 남산 N서울타워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아파트. /연합뉴스
서울 남산 N서울타워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아파트. /연합뉴스
상황이 이렇다보니 시장에서는 매물의 가격이 벌어지고 있다. 입주가 즉시 가능한 물건은 매매가가 되레 치솟고, 전세기간이 많이 남아 있는 매물의 경우 호가가 떨어졌다. 서울 마포구 아현동 ‘마포래미안푸르지오’ 전용면적 84㎡는 매수 즉시 입주가 가능한 물건의 호가가 최고 18억원에 달한다. 그러나 내년 2월까지 세입자와 전세 계약이 돼 있는 동일한 주택형의 가격은 16억원 초반까지 내려갔다. 강동구 고덕동의 ‘고덕그라시움’ 전용 59㎡의 경우, 즉시 입주 가능한 매물 호가는 14억원, 전세를 낀 물건은 13억원으로 최고 1억원 이상 차이가 난다.

고덕동의 한 중개업소 관계자는 “즉시 입주 가능한 매물이 매우 귀하고 호가도 비싸다”면서 “ 현재 세입자가 살고 있는 물건은 4년간 세입자에게 묶이는 셈이니 매수자들이 쉽게 계약을 하려 들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갭투자 하지 말라더니…이젠 하라고?"

규제가 임차인을 일방적으로 우대하다보니 실수요자가 오히려 피해를 입고 있다. 실거주 목적의 매수가 어려워지면서 시장에는 전세를 끼고 매매하는 '갭투자' 물건이 늘고 있다. 실수요자들은 임차인이 나갈 때까지 울며 겨자먹기로 '갭투자'를 하게 된 셈이다.

실수요자들은 정작 내 집을 놔두고 다른 집에 전세를 살아야 하는 고충이 발생한 것이다. 새로 구한 전세집의 집주인 또한 연쇄적으로 이러한 처지에 내몰릴 가능성이 있다. 규제가 또다른 피해를 키우는 '규제의 역설'이 현실화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졸지에 갭투기꾼 됐어요"…실수요자 피해 키우는 임대차법
특히 서울 서초구와 용산구 등 고가 아파트가 밀집한 지역에서의 갭투자 비율이 지난달 70%를 넘었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박상혁 의원이 국토부에서 제출받은 ‘2018년 이후 갭투자 현황’에 따르면 올해 8월 서울 서초구의 갭투자 비율은 72.4%로 집계됐다. 용산구는 123건 중 87건(70.7%)이 갭투자였고 △강남구 62.2% △성동구 54.7% △강동구 54.5% △관악구 51.2% △송파구 50.7% 등도 갭투자가 절반 이상인 것으로 조사됐다. 서울 평균 갭투자 비율은 44.4%였다.

실수요자들 사이에선 "이젠 내 집 사고 입주도 못 하게 됐다", “정부가 갭투자 하지 말라더니 이젠 실거주 막고 억지로 갭투자 만든다” 등의 하소연이 나오고 있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 또한 “지금도 2년까지 세 끼고 집 사고판다. 이제는 임차인이 살 수 있는 기간이 2년에서 4년으로 늘었다는 걸 전제로 매매 거래가 바뀌게 될 것”이라는 발언으로 정부가 갭투자를 용인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한 부동산업계 관계자는 “지금의 갭투자는 세입자를 내보내기도 어렵게 돼 어쩔 수 없이 보증금을 승계 받은 경우일 가능성이 높다”며 “정부가 갭투자를 막겠다고 공언해놓고 세입자가 있는 집을 사면 실거주를 하지 못하고 2년은 임대로 돌려야 해 결국 갭투자자 외에는 집을 살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놨다”고 말했다.

안혜원 한경닷컴 기자 an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