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입자 열에 아홉은 전세자금대출을 받았어요.”

저금리 '버팀목 대출' 받기 쉬워지자 대출금액 늘며 전셋값 끌어올려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서 빌라 수십 가구를 세놓던 집주인의 잠적으로 전세보증금을 날릴 처지에 몰린 세입자 이모씨의 말이다. 이씨 같은 임차인은 갭 투자자로선 ‘물주’나 다름없다. 전세대출로 자금을 대신 끌어와 매매가격에 육박하는 보증금을 채워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갭 투자자는 대출 한 푼 받지 않고 소액만으로 집 한 채를 살 수 있다.

전세대출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은행별 자체 대출과 정부 지원 대출이다. 대형 시중은행 다섯 곳의 자체 전세대출은 전세보증금의 최대 80% 선에서 5억원(수도권)까지 빌려준다. 정부가 주택도시기금을 통해 지원하는 정책대출은 보증금의 70~80%, 최고 2억원 한도다. ‘버팀목 전세자금’과 ‘신혼부부전용 전세자금’이 대표적인 정책대출 상품이다. 정책대출의 금리는 연 1.2~2.9% 수준으로 낮은 편이다. 자격도 까다롭지 않다. 보증금 1억~2억원대의 빌라 세입자는 대부분 기금 지원 전세대출을 받는다. 사실상 저리 월세다.

서민 주거 안정에 한 축을 맡고 있지만 부작용이 없는 건 아니다. 대출이 워낙 쉽다 보니 전세가격이 대출이 가능한 액수만큼 부풀려지고 있다. 일선 중개업소에선 “버팀목 대출이 가능한 집”이라며 오히려 세입자의 대출을 유도하기도 한다. 임대인이 책정한 보증금은 여기에 웃돈을 살짝 얹은 금액이다. 매매가격과도 거의 차이가 없다. 세입자 대출로 집값을 유지하면서 이자도 세입자가 내는 구조인 셈이다.

최근엔 대출 절차가 간소화되고 심사 기간도 줄었다. 보증 요건 완화에다 저금리까지 맞물려 가계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고 있다. 한국은행이 집계한 올해 1분기 국내 가계대출 증가액에서 보증부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46.2%로 절반에 육박했다.

한은은 ‘상반기 금융안정보고서’에서 “전셋값 하락 등 주택시장이 급변하는 상황에서 전세대출의 신용위험이 높아질 수 있는 만큼 보증한도와 금리 등 리스크 관리 체계를 점검해야 한다”며 “과도한 보증부대출은 금융시스템의 안정성 유지와 금융소비자 보호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다만 전세대출 관련 규제는 신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민들의 실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다. 고제헌 주택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주택담보대출 규제처럼 오히려 실수요자의 주거비 부담을 가중시킬 수 있기 때문에 면밀히 살펴봐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전형진 기자 withmol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