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한국인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에 도전한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  /연합뉴스
첫 한국인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에 도전한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 /연합뉴스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 선임 문제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이 새 수장 후보로 막판까지 선전했으나 결국 차기 WTO 총장은 나이지리아의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가 될 것 같습니다. 다수표를 확보하는 인물이 수장을 맡는 관례 때문이죠. 오콘조이웨알라 후보는 164개 WTO 회원국 중 104곳의 지지를 받은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초강대국 미국이 한국 후보를 적극 밀고 있지만 중국과 일본, 유럽연합(EU), 아프리카 등의 반대 표를 넘어서기 어렵습니다. 외신들은 세계 1,2위 경제 대국인 미국과 중국 간 무역 전선이 WTO 선임 이슈로 증폭됐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한국과 일본은 통상 분쟁을 겪고 있기 때문에 일본의 반대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이 한국 관료의 WTO 수장 도전에 처음부터 반대 입장이었던 점이 확인된 점은 아쉽습니다. 우리 정부가 그동안 중국에 대해 공을 들여 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오콘조이웨알라 후보는 세계은행에서 오래 근무한 외교관이지만 무역이나 WTO 분쟁 경험은 많지 않다는 게 중론입니다. 이에 비해 유 본부장은 무역 분쟁을 다룬 경험이 훨씬 많지요. 25년 간 통상 분야만 전담했습니다.

중국은 왜 한국의 WTO 총장 도전에 반대했을까요.
세계무역기구(WTO) 대표단이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의 본부 앞에서 “차기 WTO 수장 후보로 오콘조이웨알라가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WTO 제공
세계무역기구(WTO) 대표단이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의 본부 앞에서 “차기 WTO 수장 후보로 오콘조이웨알라가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WTO 제공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 등 중국계 언론에 따르면 중국은 애초 한국과 나이지리아 후보 모두에 대해 우려하는 입장이었습니다. 특히 오콘조이웨알라가 미국 여권을 소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워싱턴의 세계은행 본부에서 수 년 간 근무해 친미(親美) 성향이 있을 것을 의심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한국의 유 본부장보다 차라리 오콘조이웨알라 후보가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지역 균형’에 대한 우려였다고 합니다. 중국은 WTO 사무차장 자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WTO 사무차장은 4명으로, 총장이 지명합니다. 1명은 최대 분담금을 내는 미국 국적자로 정해져 있고, 나머지 3명은 중남미와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등에서 배출합니다. 중국인 이샤오준이 2013년부터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요. 한국인이 WTO 수장을 맡으면 이 자리가 불안해질 수 있다고 봤습니다. 아시아에서 총장-차장을 둘 다 차지하기 어려울 것이란 판단이죠.

두 번째는 중국이 아프리카에 대한 경제적 지배력을 유지하려고 전략적으로 아프리카 출신 총장을 지지했다는 겁니다. 중국은 일대일로(육·해상 실크로드)의 성공을 위해 아프리카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으며 공을 들여 왔지요. 나이지리아 출신 후보가 총장이 되는 게 자국 이익에 더 부합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또 다른 이유로, 유 본부장이 중국보다 미국에 더 가깝다는 점도 작용했을 겁니다. 유 본부장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 등 과정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습니다. 워싱턴 무역관료들과의 친분이 두텁습니다. 중국이 좀 부담스러워할 수 있습니다.

이제 한국과 미국의 연합 전선이 어떤 ‘퇴장’을 할 것인가만 남은 상태로 보입니다. 우리 정부로선 오는 9일 총회 정식회의 전에 결정을 내려야 할 상황이지요.

WTO 수장 자리를 둘러싼 치열한 외교전이 남긴 성과도 있습니다. 초반 열세에도 불구하고 ‘한국 후보’를 끝까지 지지해 준 진짜 친구를 식별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죠. 이번에 한국을 지지한 국가는 60개국입니다.

뉴욕=조재길 특파원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