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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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

국회에서 20년 가까이 근무한 한 입법조사원은 5일 본회의에서 인터넷전문은행 설립 및 운영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이 부결되자 이렇게 말했다. 여야가 상임위에서 통과시키기로 합의한 법안이 본회의에서 부결된 전례를 찾기 힘들다는 이유에서다.

개정안은 인터넷은행 대주주 결격 사유에서 공정거래법 위반을 빼는 게 핵심이다. 은행업과 무관한 혐의로 공정거래법을 위반한 것까지 결격 사유에 포함하는 건 과도하다는 지적이 일어서다. 통신업에서 담합 등으로 공정거래법을 위반한 전력이 있는 KT가 수혜 기업이 될 전망이었다. 법이 통과되면 KT는 인터넷전문은행 케이뱅크의 최대주주가 될 수 있었다.

'법을 어긴 기업에 은행업을 열어서는 안된다'는 논리는 단순하지만 강했다. 그럼에도 소관 상임위원회인 정무위원회 여야 간사는 인터넷전문은행 활성화를 위해 법안 통과에 합의했다. 민주당이 요구한 금융소비자보호법도 함께 통과시키기로 했다.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채이배 민생당 의원이 극렬 반대했지만 전날 법사위 문턱까지 넘었다. 통상 여야가 합의한 법안은 본회의에서 무난하게 통과된다. 이번에는 달랐다. 민주당 의원들이 무더기로 반대표를 던졌다. 재석의원 184명 중 반대가 82명이었다. 민주당 소속 의원 60명이 반대했다. 20대 국회 들어 본회의에서 부결된 법안은 한국광물자원공사법 1건이다. 본회의에 올라오는 법안은 대부분 90% 이상 찬성으로 통과됐다.

본회의 전 무슨 일이?

통합당은 "민주당이 법안 순서까지 바꿔가며 정치적 약속을 어겼다"고 반발했다. 통합당에 따르면 인터넷은행법 개정안은 22번째 순서였다. 이후 금융소비자보호법 개정안 처리가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본회의에서 두 법안의 순서가 바뀌었다. 민주당 의원들은 금융소비자보호법에는 찬성표를 던져 통과시킨 뒤 인터넷은행법에는 반대표를 던졌다. 심재철 통합당 원내대표는 "자기들 원하는 금융소비자보호법 통과됐으니 인터넷은행법 아예 포기시켜버렸다"며 "전날 낮까지만 해도 인터넷은행법이 먼저고, 금융소비자법이 그다음이었다"고 주장했다.

민주당 관계자는 "실무자들이 정무위에서 그대로 올린 거 같은데 누가 그걸 용의주도하게 했겠냐"고 반문했다.

불똥은 국회의장에게로 튀었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부결 직후 보도참고자료를 내고 "본회의에 상정된 금융소비자보호법과 인터넷은행법 진행 순서에 대해 일체 관여한 적이 없다"며 "이 진행 순서는 법사위와 동일하며 법사위 의결 후 의사국을 거쳐 본회의에 부의된 순서 그대로"라고 해명했다.

본회의 직전 열린 민주당 의원총회에서는 인터넷은행법 반대파 목소리가 컸던 것으로 전해졌다. 고용진 민주당 의원은 "정무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회의 중에 의원총회를 한 모양"이라며 "정무위에서 합의되고 논의됐던 게 의총장에 정확히 전달이 안됐다"고 전했다. 이어 "원내대표도 이런 내용을 모르니 구체적인 지침을 내린 바가 없다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결국 당론을 정하지 않고 의원 자율에 투표를 맡겼다는 설명이다.

합의 깨 놓고 적반하장

개정안이 부결된 뒤 민주당 일부 의원은 통합당을 탓했다. 박용진 민주당 의원은 "정태옥 의원이 말을 잘하셨어야지, 대한민국 법률이 1+1 패키지냐"며 "자기들이 70명밖에 안 와놓고 왜 나한테 화내느냐"고 했다. 정태옥 통합당 의원이 표결 직전 토론에서 "여야 합의로 금융소비자 보호법과 패키지로 통과시키기로 했던 법"이라고 말한 데 따른 것이다.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는 책임을 회피했다. 이 원내대표는 통합당 의원들이 반발하자 "나는 찬성했다. 일부러 지시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20대 국회 내 통과 가능할까?

민주당은 4·15 총선이 끝나고 다음 회기 때 인터넷은행법 통과를 재추진하겠다고 통합당에 약속했다. 한 번 부결된 법안은 같은 회기 내 제출할 수 없는 일사부재의 원칙에 따라 이번 회기에서는 인터넷은행법이 다시 상정될 수 없다. 때문에 총선 이후 임시회를 소집해 인터넷은행법을 통과시키겠다는 게 민주당 약속이다.

하지만 쟁점이 첨예한 인터넷은행법이 또다시 상임위와 법사위를 거쳐 본회의로 올라올 수 있을지 미지수다. 모처럼 여야가 합의한 내용을 민주당이 깨버리면서 여야 간 가늘게 남아있던 신뢰의 끈이 끊어져버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조미현 기자 mwis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