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 안전, 안전! 전 계류색 걷어!”

2018년 12월 20일 오후 3시 경남 진해항. 우리 해군의 첫 이지스 구축함인 세종대왕함의 갑판 병사가 출항 명령이 떨어지자 이렇게 외쳤다. ‘홋줄’이란 별칭으로 더 유명한 계류색은 부두와 함정을 연결하는 밧줄이다. 함정이 클수록 계류색도 굵다. 세종대왕함의 계류색은 웬만한 남성 주먹 한 개의 굵기였다.

“거기 서 계시면 위험해요! 떨어진다고요! 저리 가세요!” 붉은 카포크(훈련 때 쓰이는 특수 구명조끼)를 입은 병사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계류색을 걷고 푸는 과정에서 자칫 배에서 추락하거나 갑판에서 미끄러지는 사고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종대왕함에서 보낸 22시간은 그렇게 시작됐다.
◆‘아테나의 방패’는 잠 못 이루고

이지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전설의 무기 아이기스(Aegis)의 영어식 발음이다.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나가 항상 들고 다니는 방패로 어떤 무기든 모드 막아낼 수 있고,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을 공포에 질리게 만든다고 묘사된다. 이지스함은 이 아테나의 방패에서 이름을 따 왔다. 한 척의 군함이 탐지와 방어, 공격을 모두 해 낸다. 현재 우리 해군은 세종대왕함과 율곡이이함, 서애유성룡함 등 3척의 이지스함을 갖고 있으며, 2020년까지 3척을 추가 도입할 계획이다.

해군 제7기동전단 소속인 세종대왕함은 2007년 5월 25일 진수식을 거쳐 2008년 12월 22일 취역했다. 이로써 한국은 세계 다섯 번째 이지스함 보유국이 됐다. 미국 록히드마틴의 SPY-1D 레이더를 중심으로 한 이지스 전투체계를 갖췄다. 공중 표적을 최대 1000km 밖에서 탐지하고, 1000여개의 표적을 동시에 탐지·추적해 20여개의 표적을 동시에 공격할 수 있다. 최대 사거리 150㎞의 국산 대함유도탄 ‘해성’과 장거리 대잠어뢰 ‘홍상어’ 등도 탑재한다. 각종 무장이 상충하지 않도록 교전 우선순위를 자동으로 설정하며, 체계가 프로그램화 돼 있어 운용자의 개입 없이 위협에 자동으로 대응할 수 있다. 4개의 가스터빈 엔진을 갖췄다는 점 역시 세종대왕함만의 특징이다. 평소엔 2개의 엔진을 가동하지만 고속 운전시 4개를 동시에 움직여 최고 30노트(약 55.6㎞/h)의 속력을 낼 수 있다.

세종대왕함엔 최대 300명이 탈 수 있으며 상시 근무 인력은 280여명이다. 모두 해군 최고의 정예 장병이다. 이 중 부사관 및 장교가 180여명, 일반 사병이 100여명이다. 해군 관계자는 “전문적인 기술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간부들 중심으로 구성된다”고 설명했다.
근무 인원 중 약 10%인 27명이 여군이다. 함정 내에 여군 거주구역이 따로 있으며, 남군의 출입은 철저히 금지된다. 하지만 여군이라 해서 특별한 혜택이 있는 건 아니다. 한 평(약 3.3㎡) 남짓한 크기의 침실에 3층 침대가 있다. 여군 침실은 3개(5명, 6명, 15명)며 각 방마다 화장실과 샤워실이 하나씩 있다.

제주기지가 모항인 세종대왕함은 최근 제주와 부산 군항을 오가며 작전을 수행한다. 작전훈련은 보통 보름씩 이어진다. 장병들은 임무수행 15분 전부터 모든 준비를 완료해야 한다. 작전은 24시간 쉬지 않고 이어진다. 잠들 수 없다.

배 양 옆 외부에 설치된 윙브리지에선 쌍안경과 맨눈으로 외부를 실시간으로 살피는 견시(見示) 병사들이 12월의 차디찬 겨울 바닷바람에 몸을 맡긴 채 3교대 근무를 섰다. 세종대왕함의 모든 기관을 통제·점검하는 중앙조종실에선 17명의 장병들이 모니터에 나타나는 엔진과 조수기(바닷물을 담수화해 식수, 생활용수로 공급하는 기기), 발전기 등 주요 장비들을 점검했다. 배를 조종하는 조타사들이 근무하는 함교에선 깜깜한 어둠 속에서 경계 임무를 수행했다. 칠흑 속에 빛나는 건 어선들의 노란 불빛뿐이었다.
◆터지지 않는 핸드폰…TV와 책, 운동

해군의 모든 함정에선 핸드폰을 사용할 수 없다. 일단 바다에 나가면 통신이 되지 않는데다, 보안상 위치가 노출될 우려도 있어 함장 이하 전 탑승자의 핸드폰을 수거한다. 육지와 연락이 완전히 끊긴다.
일과를 마치면 TV를 보거나 책을 읽는다. 운동을 할 수 있는 체력단련실도 마련돼 있다. 사병들은 식당이나 내무반 TV에서 아이돌 가수들을 보며 외로움을 달랜다. 내부 매점도 있다. 이름은 ‘세종마트’다. 하지만 아무 때나 갈 수는 없다. 운영 시간은 오전 8시30분~11시30분, 오후 1시~오후 4시30분, 저녁 7시~밤 10시까지다. 그나마도 바다로 떠나기 전 육지에서 미리 채워오는 게 전부라 280여명에겐 모자라다.
하지만 해군 복무 장병들 중 함정 근무 희망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해군 관계자는 “배 안에서 생활하는 게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진정한 해군으로서 일한다는 자부심도 얻을 수 있고, 휴가와 추가 수당 등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해군의 일반 사병들 중 약 절반이 ‘바다 근무’를 한다. 그들의 왼쪽 가슴엔 그것을 상징하는 작은 배지가 있다.
밤이 되었다. 3층 침대 중 1층에 배정됐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사다리가 없기 때문에 오르고 내릴 때 조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넘실대는 파도와 한 몸이 되는 느낌이었다. 천장과 얼굴 사이의 간격은 10㎝ 정도에 불과했다. 하룻밤 취재에 칭얼댈 순 없었다. 바다 위 장병들에겐 이게 매일의 삶이다.

◆이어도를 품에 안고 돌아오다

21일 아침 7시28분, 이어도 해양과학기지가 옆에 보이는 곳에 세종대왕함이 근접 항해할 때 해가 떴다. 구름에 가려 일출을 보진 못했지만 이어도 기지의 탑은 볼 수 있었다.
이어도는 암초다. 암초이기 때문에 영해 개념을 주장할 수는 없지만 한국과 중국, 일본 사이에 있기 때문에 언제나 수역 논란의 중심에 있다. 특히 중국의 경우 매일 이어도 근해에서 군함이 1척씩 상시 순찰한다.

이 곳은 제주도에서 예로부터 ‘환상 속의 섬’으로 불려졌다. 제주 민요 ‘이어도 타령’이 대표적이다. 해상 암초인 이어도가 보일 만큼 풍랑이 거세게 일면 이 곳에 고기잡이를 나섰던 남자들은 목숨을 잃었다. 이어도 타령은 그 곳에서 숨진 남편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해녀들의 노래다. 제주 민간 설화에 따르면 이어도는 여인들만 사는 곳이며, 육지에서 오는 남자들을 무척 환대해서 이 곳에 온 사내들은 다시는 뭍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 전설과 노래를 생각하며 이어도 기지를 바라보니 더욱 착잡했다.

21일 오후 1시께 제주 군항으로 돌아왔다. 항해가 끝났다. 갑판 병사들이 홋줄을 풀었고, 예인선이 부두로 인도했다. 기자에겐 하루의 추억이겠지만, 장병들에겐 매일의 일상이다. 10년 동안 한 번도 사고가 난 적 없는 세종대왕함이지만 언제나 훈련엔 목숨이 담보로 걸린다.
이구성 세종대왕함장(대령)은 “세종대왕함은 취역 후 10년 간 해양수호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강도 높은 훈련으로 대비태세를 확립해왔으며, 그 능력을 실전에서도 발휘해 왔다”고 강조했다. 또 “1985년 당시에 해군 선배님들께서 율곡이이의 십만양병설과 같은 혜안으로 이지스구축함 건조 소요를 제기했고, 이지스 구축함 건조 사업에 대한 의지가 하나로 모아져 오늘의 해군력을 갖추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세종대왕함=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