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정권 수립 70주년 기념일인 ‘9·9절’ 군사 퍼레이드(열병식)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 최신예 무기를 등장시키지 않았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육성 연설도 없었고, 조선중앙TV의 생중계도 생략됐다. 미·북 비핵화 협상 재개를 앞두고 국제사회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신중 모드’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미국에 유화 메시지 보낸 北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9·9절 열병식은 9일 오전 10시께 시작해 낮 12시 무렵에 끝났다. 김정은은 중국 권력 서열 3위인 리잔수(栗戰書)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과 열병식 주석단에 나란히 나와 열병식을 지켜봤다. 김정은과 리 상무위원장은 주석단에서 서로 손을 맞잡고 위로 올려들며 북·중 친선관계를 과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리 상무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친서도 전달했다고 중국 국영 CCTV가 보도했다.

이번 열병식에서 북한은 ICBM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등으로 무장한 미사일부대의 행진을 뺐다. 작년까지만 해도 김정은은 미사일부대를 사열하며 미국 등 국제사회를 향해 핵 보유국으로서의 위력을 과시했다.

이와 관련, 지난 6일 미국의소리(VOA)방송은 평양 인근에 세워졌던 ICBM 조립시설이 완전히 해체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사흘 만에 다시 만들 수 있을 정도의 간이시설이긴 하지만 이것 역시 미국을 향한 비핵화 의지의 표현과 무관치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김정은이 이번 열병식 때 직접 연설하지 않은 것도 주목할 만한 변화로 해석된다. 주석단에 함께 자리한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연설을 맡았다. 비록 북한 헌법상의 수반은 김영남이기 때문에 정권 수립 기념일이란 성격을 비춰볼 땐 김 상임위원장이 연설을 맡는 게 맞지만, 이른바 ‘꺾어지는 해(5년, 10년 단위로 떨어지는 해)’엔 북한이 크게 행사를 치른다는 점을 볼 때 김정은이 대외 메시지를 전혀 내놓지 않은 건 이례적이다.


◆집안 잔치로 끝난 9·9절

‘소박한’ 열병식을 통해 북한이 대외적으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 것이냐에 대해선 국제사회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시도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오는 18~20일 평양에서 열릴 3차 남북한 정상회담도 감안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김정은은 지난 5일 문재인 대통령이 파견한 대북 특별사절단과의 면담에서 비핵화 ‘시간표’를 제시하는 등 유화적인 모습을 보였다.

합동참모본부는 “이번 열병식에서 나온 무기들에 대해 겉으로만 봐선 정확히 무엇이라 말하긴 어려우며 좀 더 정밀 분석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2·8 건군절 규모 선에서 벗어나지 않은 건 국제사회가 이번 행사를 상당히 경계했다는 점을 의식한 듯하다”고 덧붙였다.

‘대(大) 경사’로 경축하겠다던 당초 호언장담과 달리 사실상 ‘집안 잔치’로 끝났다는 점도 김정은 연설과 생중계가 생략된 원인으로 거론된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행사 전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북설까지 나올 정도로 기대가 컸지만 북한과 친한 몇몇 국가들과 상징성이 떨어지는 인물들만 오면서 결국 대규모 흥행몰이에 실패했다”며 “김정은이 현 상황에서 별로 할 말이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행사에 초청된 외빈 중 세계적으로 알려진 최고위급은 리 상무위원장과 발렌티나 마트비옌코 러시아 상원의장뿐이다.

북한 노동신문은 이날 평소보다 2개 면 늘린 8면으로 발행됐다. 핵과 미사일, 미국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이 신문은 “최강의 전쟁억제력을 갖게 된 건 민족사적 대승리”라고 자부했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