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 영욕의 삶…3당합당, DJP연합으로 정적까지 대통령으로 만든 ‘킹메이커’

김종필 전 총리는 육사 8기 출신으로 중령이던 1961년 5월 16일 처삼촌인 당시 박정희 소장의 5·16 쿠데타를 적극적으로 도우면서 현대 정치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JP는 서울대 사대 2학년 때 부친의 사망을 계기로 가세가 기울자 교사의 꿈을 접고 육사에 입학했다. 1960년 중령이던 그는 육사8기 동기생들과 함께 3·15 부정선거에 연루된 정치군인 등의 퇴진을 주장하는 정군운동을 일으켰다가 하극상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군복을 벗었다. 이 사건은 그가 군사쿠데타에 가담하는 길로 이어졌다.

5·16쿠데타를 계기로 최고통치권자와 2인자라는 동지 이상의 운명으로 발전하면서 JP의 앞날에는 탄탄대로가 열렸다.1961년 중앙정보부를 창설, 초대 부장에 취임하고 이어 1963년 공화당 창당을 주도했다. JP는 1971년부터 1975년까지 국무총리를 지냈다. 그러나 1979년 10월 26일 박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고 5공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그는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돼 모든 재산을 압류당하고 미국으로 쫓기듯 떠나는 신세가 됐다.

1986년 귀국한 JP는 서슬 퍼런 5공 정권하에서 비밀리에 옛 공화당 세력을 규합,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했다. 이듬해 당시 양김으로 불렸던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대선에 출마한데 이어 1988년 13대 총선에서 충청권을 중심으로 35석을 확보, 3김 시대를 열었다.

1990년 1월 ‘3당 합당’에 참여, 여권으로 옮겨온 그는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후보를 지원했다. 민자당 최고위원에 이어 당대표까지 맡으며 JP는 여당을 이끌었다. 하지만 1994년엔 민주계를 중심으로 자신을 축출하려는 움직임이 노골화되자 탈당, 자민련을 창당했다. 1996년 자민련은 15대 총선에서 50석으로 원내 입지를 구축, 정치적 에너지를 비축한 JP는 여세를 몰아 1997년 대선에 나섰다. 그러나 ‘여야 정권교체’를 명분으로 후보 단일화에 전격 합의, 김대중 후보에게 힘을 보탬으로써 또다시 ‘킹메이커’ 역할을 했다.

김 후보의 당선으로 국민회의·자민련 공동정권이 출범하자 JP는 두 번째 총리직이자 새 정부의 초대 총리에 오르며 권력을 분점하는 ‘슈퍼파워’를 과시했다. 하지만 공동정권의 한 축이었던 JP의 정치적 입지도 2000년 2월 DJP 연대가 파기되면서 급격히 약화하기 시작했다. 자민련은 2000년 16대 총선에선 17석, 2004년 17대에서는 4석을 얻는 초미니 정당으로 쇠락했다.

특히 17대 총선에서 9선에 더해 10선을 꿈꿨으나 최악의 성적표로 비례대표 1번인 자신조차 낙선하는 수모를 겪으며 재기불능 상태로 몰렸다. JP는 총선 참패 후 자택에서 칩거하다 2004년 4월 19일 “43년간 정계에 몸담으면서 재가 됐다”며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박재원 기자 wonderfu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