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담판'으로 주목받는 북미 정상회담이 시작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2일 정상회담 장소인 싱가포르 센토사섬 카펠라 호텔에서 마주하고 역사적인 악수를 했다.

미국 성조기와 인공기가 나란히 배치된 회담장 입구 레드카펫으로 양쪽에서 나온 두 정상은 약 10초간 악수과 함께 간단한 담소를 나눴다.

두 정상 모두 활짝 웃는 모습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악수를 한 뒤 "무한한 영광이다. 좋은 대화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고 김 위원장은 "모든 것을 이겨내고 이 자리까지 왔다"고 답했다.

이어 두 정상은 통역과 함께 단독 회담장으로 향했다.

한국전쟁 정전 후 70년 가까운 적대관계를 이어온 양국의 현직 정상이 최초로 만나 북미의 적대관계를 끝내고 한반도의 데탕트를 열 수 있는 세계사적 사건을 연출한 것이다.

두 정상은 오전 10시부터 15분간 인사 겸 환담을 한 뒤 10시 15분부터 11시까지 45분간 통역만 대동하고 1 대 1 단독회담을 할 예정이다. 이어 11시부터 12시 30분까지 확대회담이 열리며 바로 업무 오찬으로 이어진다.

오늘 회담 결과에 따라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각각 비핵화와 체제 안전 보장 같은 반대급부의 최종 수위를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미국과 북한 양국 간 접촉이 전무한 것은 아니었지만, 북미 정상이 회담장에서 마주하는 것은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종전선언 이후 북한과 미국의 그간 만남의 역사를 짚어봤다.



◆ 1953년 정전협정

미국과 북한의 회담은 1953년 7월27일 체결된 정전협정에서 시작됐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당시 클라크 UN군 총사령관과 김일성 북한군 최고사령관, 펑더화이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의 서명으로 중단됐다.

북한은 한국전쟁 직후부터 핵 기술 개발에 뛰어들었다. 1956년 6월에는 소련과 연합 핵 연구소와 관련된 협정을 체결했다. 1974년 5월 북한은 국제원자력협력기구(IAEA)에 가입하며 핵개발을 전 세계에 공식적으로 알렸다.

이로 인해 미국과 북한은 핵 문제를 두고 마찰을 겪기 시작했다. 북한은 1991년 12월 '남북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통해 비핵화 의지를 드러내는 듯했지만, 1993년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면서 1차 북핵 위기가 찾아왔다.

◆ 1994년 카터 전 대통령-김일성 주석 만남

당시 이 갈등상황을 돌파한 것은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었다. 1994년 6월 민간인 신분으로 방북한 카터 전 대통령은 김일성 주석을 만나 대화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같은 해 10월, 북한이 핵을 동결하고 NPT에 복귀하는 대가로 미국이 북한에 경수로를 건설 및 연간 50만 톤의 중유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한 '제네바 합의'가 이뤄진 것이다.

◆ 2000년 첫 북미 외교장관회담 개최

하지만 제네바 합의의 이행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경수로 건설 등 미국의 약속 이행이 늦어지자, 1998년 8월 북한은 이를 빌미로 중장거리 미사일 대포동 1호를 발사하고 만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1999년 5월 윌리엄 페리 전 국방부 장관을 대북정책 조정관으로 임명하며 대화를 이어가려는 의지를 보였다.

이로 인해 북미 대화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2000년 7월 방콕에서 첫 북미 외교장관회담이 열렸고 같은 해 10월 10일 조명록 당시 북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미국을 방문해 클린턴 대통령을 만났다.

◆ 北 '악의 축'으로 선언한 부시 행정부

빌 클린턴 대통령이 조성한 대화분위기는 2000년 11월 조지 부시 정부가 탄생하면서 반전을 맞았다. 당시 클린턴 대통령은 평양 방문 계획을 취소했다.

그러다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하면서 미국의 대북정책의 기조는 완전히 180도 바뀌었다.

부시 대통령은 국정연설에서 북한을 이라크, 이란과 함께 '악의 축'이라고 선언했다. 2002년 제네바 합의는 사실상 파기됐고 북한이 2003년 1월 NPT 탈퇴를 발표하면서 2차 북핵 위기가 찾아왔다.

미국과 북한의 관계가 악화되자, 2003년 중국은 중재에 나서며 6자(한국·북한·미국·중국·러시아·일본) 회담을 제안했다. 2005년까지 이어진 회담에서 북한이 모든 핵무기를 파기하고 IAEA와 NPT로 복귀한다는 내용의 '9.19 공동성명'을 이끌어냈지만, 합의 1년여 만에 북한은 미사일을 발사하고 핵실험을 단행하면서 파국으로 치달았다.

◆ 2009년 오바마 정부 국제사회 제재 강화

2009년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섰지만, 북한의 도발은 이어졌고 국제 사회의 제재도 점점 강화됐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집권 이후인 2012년 북미는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과 글린 데이비스 대북정책 특별대표 간의 협의를 거쳐 북한의 핵 동결과 미국의 대북 식량 지원을 골자로 하는 '2.29 합의'를 발표했지만 2개월도 지나지 않아 북한이 장거리 로켓 은하 3호를 발사했다.

◆ 2017년 북한 6차 핵실험에 냉각된 국제사회

지난해 9월에는 북한의 6차 핵실험으로 북미 관계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 분위기까지 얼어붙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는 원유 공급을 감축하는 내용이 담긴 UN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 2018년 평창올림픽 계기로 훈풍 시작

꽁꽁 얼었던 분위기는 올해 초 급변했다.

지난 1월 9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25개월 만에 남북 고위급회담이 개최되고, 이어 평창 동계올림픽에 북한 고위 인사들이 참여하면서 남북 및 북미 대화는 급물살을 타게 됐다. 이 과정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을 '위원장(Chairman)'이라고 호칭했다. 지난해 '꼬마 로켓맨'이라고 조롱했던 것을 떠올리면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4월 29일 김 위원장을 가리켜 “핵무기를 가진 미치광이”라고 지칭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어 8월 8일 휴가 도중 북한을 겨냥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분노와 화염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뒤 1개월 뒤인 9월 17일엔 트위터 계정에 “김정은은 로켓맨”이라고 조롱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엔 김 위원장에 대해 냉온탕을 오가는 발언으로 북한 관련 이슈를 선점했다. 공화당 경선후보 시절인 2015년 9월 TV토론에선 김 위원장을 “장거리 미사일을 가진 미치광이”로 지칭했다. 대선후보로 공식 지명되기 전인 2016년 6월 애틀랜타 유세에서는 “김정은과 햄버거를 먹으면서 협상하겠다”고 발언하며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 65년만에 마주한 북미정상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양국 외교수장이 강경발언을 이어가다 급기야 회담 전격 취소발표까지 살얼음판을 걷던 북미정상회담. 문재인 대통령은 깜짝 2차 남북정상회담으로 중재외교의 빛을 발했고 다시 북미정상회담 재개라는 성과를 이뤄냈다.

오늘 열리는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확대회담에는 트럼프 대통령의 오른팔인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부 장관과 존 켈리 백악관 비서실장,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참석한다.

이번 회담의 쟁점이 될 CVID(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ment)는 조지 부시 행정부 1기 때 수립된 북핵 해결의 원칙이다.

이는 북한이 핵개발 프로그램을 복구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으로, 미국은 북핵 6자회담에서도 CVID 방식의 핵문제 해결을 북한에 요구한 바 있다. 어떻게 폐기해야 '돌이킬 수 없는' 것인지에 대해 이번 회담을 통해 논의가 이뤄질 것으로 관측된다.

65년간 반전의 반전을 거듭했던 북미 관계가 6.12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신호탄이 될 수 있을지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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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나 한경닷컴 기자 help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