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떠받쳐 온 김일성 왕가의 숙청사
북한 현대정치사는 숙청의 역사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피비린내 나는 처형과 암살이 반복됐다. 무자비한 숙청은 김일성과 김정일, 김정은 3대 ‘세습왕조’를 떠받치는 핵심 수단이다.

1948년 북한에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된 뒤 ‘김일성 수령 유일체계’가 확립된 1960년대 말까지 김일성은 정권 창출 공동 세력들을 제거하고 1인 독재를 공고히 하는데 집중했다. 해방직후 소련군을 등에 업고 북한에 들어온 김일성은 지지 기반이 약했다. 당시 북한 지도부에는 크게 소련파, 연안파, 갑산파, 국내파 등 4개 계파가 활동했다. 정권 초반 북한은 이들 계파들의 연합정권 성격을 띠었다. 김일성은 중국에서 활동했던 연안파 중심의 조선신민당과 남조선노동당(남로당) 등을 통합해 조선노동당을 창설하고 당중앙위원회 위원장에 올랐다.

이후 김일성은 1인 지배체제 확립을 위해 각 계파들을 단계적으로 제거해 나갔다. 1955년까지 박헌영·이승엽 등 남로당 계열 간부들 처형 작업이 이뤄졌다. ‘미제의 간첩’이란 명목을 내걸었다. 6·25 남침 실패로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려는 목적이 강했다.

소련파인 박창옥 전 내각 부수상이 남로당 제거에 앞장섰다. 그는 허가이 등 같은 소련파 제거에도 관여했다. 그러나 박창옥도 김일성에 당했다. 그는 1956년 8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김두봉·최창익 등 연안파와 손잡고 김일성의 독주에 정면으로 도전하다가 ‘반당 종파분자’로 낙인찍혀 숙청됐다. 김일성은 1958년 3월 1차 당대표자회를 계기로 연안파와 소련파는 물론 오기섭을 비롯한 국내파까지 모조리 제거했다.

1960년대 들어 김일성 친위부대인 갑산파와 빨치산파만 남았다. 김일성은 1967년 항일운동을 함께했던 노동당 2인자 박금철과 이효순 등 갑산파 주요 인물들을 제거했다. 이들은 자기세력을 확장하려다 종파분열로 몰렸다. 갑산파 제거로 1인 지배체제를 확립한 김일성은 1969년에는 김창봉 민족보위상(국방장관), 허봉학 군 총정치국장 등 군부 실세들을 ‘수령의 권위 도전’과 ‘군벌주의’라는 죄목으로 제거했다.

1인 독재체제를 공고히 한 김일성은 1970년대 들어 아들인 김정일에게 권력을 차례차례 넘겨주기 시작했다. 김정일은 1973년 9월 노동당 선전비서 겸 조직지도부장에 올랐다. 이듬해 2월엔 당 중앙위원회에서 김정일을 후계자로 추대하는 결정서가 채택됐다.

김정일도 후계 승계에 걸림돌이 될 만한 인물들 제거에 나섰다. 후계자 경쟁을 벌였던 삼촌 김영주를 자강도로 추방했다. 김영주를 추종했던 김동규 부주석과 류장식 대남비서 등도 숙청했다. 이복동생 김평일을 후계자로 옹립하려던 계모 김성애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광범위한 숙청작업도 단행했다. 김평일은 동독으로 쫓겨났다. 김평일은 헝가리, 불가리아, 핀란드, 폴란드, 체코 등을 떠돌며 대사를 맡아왔다. 그는 2015년 평양을 방문했는데, 36년만이었다. 김정일의 이복동생 김영일도 독일주재 공관에서 근무하다 2000년 사망했다.

김정일 체제에서 가장 주목 받았던 숙청작업은 1997년 벌어졌던 ‘심화조 사건’이다. 당시 채문덕 사회안전부 정치국장을 내세워 대형 간첩단 사건을 조작했다. 식량 부족으로 수 많은 아사자를 낳았던 이른바 ‘고난의 행군’으로 민심이 흔들리자 이를 수습하기 위한 숙청 작업이었다.

서관히 전 노동당 농업담당비서, 서윤석 전 평양시당 책임비서, 문성술 본부당 책임비서, 김만금 부주석 등 아버지 시대의 인물들에게 무더기로 간첩 누명을 씌웠다. 당 간부와 가족 등 2만5000여명이 제거된 것으로 알려졌다. 채문덕은 수 많은 사건을 날조해 개인 원한을 갚기도 했다. 후유증은 컸다. 당에 충성한 간부들이 간첩과 반당혁명분자라고 한다면 어떻게 나라가 지탱할 수 있었겠느냐는 거센 불만이 터져나왔다.

김정일은 보위사령부에 지시해 심화조 사건을 전면 재검토할 것을 지시했다. 채문덕의 공명심과 야망으로 날조됐다는 결론을 내렸다. 김정일은 채문덕을 간첩으로 몰아 처형하고 심화조 사건 피해자들을 복권시켰다. 채문덕은 ‘극악한 살인마’로 지목돼 2000년 7월13일 총살당했다.

김정은의 폭압정치는 도를 더했다. 2013년 고모부 장성택을 고사총으로 처형하는 등 광기 어린 숙청이 이어졌다. 현영철, 이영호, 김정각, 김영춘, 우동측 등 김정은을 떠받쳤던 측근들은 ‘토사구팽’됐다. 당국에 따르면 김정은 집권 이후 처형된 고위 간부는 3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복형 김정남 피살은 김정은 지시로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 유일체제 구축을 위해선 피붙이도 제물로 받치는게 김정은이다.

김정은은 아버지와 달리 중국도 의식하지 않는듯 하다. 중국의 경고에도 핵·미사일 발사 실험을 강행했다. 한·미 군사훈련 때 아버지 김정일은 꼭꼭 숨었다. 한반도에 출격한 미국의 스텔스기, 전략폭격기 등 무시 무시한 전략자산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한·미 훈련 중에 ‘보란듯이’ 공개활동을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정상회담을 하는 도중 신형 탄도미사일을 쐈다. ‘젊은 치기’일 수 있다.

공포정치는 ‘양날의 칼’이다. 유일체제를 뒷받침하는 핵심 수단이지만 권력층 내부에서 불안과 동요가 일어나면 체제를 무너뜨리는 요인이 될 수 있다. 공포정치에 의존한 독재자들의 말로는 한결같이 비참했다는 사실은 역사가 잘 말해준다. 김정은 체제의 몰락이 순식간에 올 수도 있다.
공포정치와 ‘젊은 치기’가 합쳐진다면 핵·미사일 위협이 언제 닥칠지도 모를 일이다. 이에 대한 철저한 준비와 대응책 마련은 필수적이다.

홍영식 선임기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