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내용 예산문제로 누락 '아쉬움'…28일 부산민주공원서 추모제

"아들이 죽은 지 11년 만에 특별법이 통과됐지만 핵심 내용이 모두 빠져 너무 아쉽습니다."

죽은 아들을 이어 원폭 2세 환우 인권운동을 해온 아버지 김봉대(80·부산 동구 수정동)씨는 생전 아들 김형률씨가 그토록 원하던 원폭 피해자 지원 특별법이 최근 통과됐지만 목소리가 밝지 못했다.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말미암은 유전적인 피해자임을 밝히고 원폭피해 2세 환우의 실상을 세상에 처음 알린 김형률 씨.

오는 29일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1주기가 되는 날이다.

17대 국회 때부터 상정된 이 특별법은 18대 국회까지 잇달아 폐기됐고 이달 19일 19대 국회에서 16년 만에 제정됐다.

원자폭탄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지 71년 만에 한국인 원폭 피해자를 지원하는 첫 특별법이었다.

하지만 특별법의 주요 내용은 한국인 원폭 피해자 지원위원회 설치, 한국인 원폭 피해자에 대한 실태조사, 원폭 피해자에 대한 건강검진 등 의료지원, 추모묘역 및 위령탑 조성 등에 그쳤다.

실태조사는 단순 자료 수집과 분석, 보고서 작성만 명시됐고 피해자의 건강상태, 생활환경, 정신건강 등 총체적인 조사내용이 예산문제로 빠졌다.

특히 장애와 질병을 앓는 원폭피해자 자녀(원폭피해 2세) 등 후손 피해 문제는 제외됐다.

아버지 김씨는 "하늘에 있는 아들이 특별법을 보고 실망하지나 않을까 걱정"이라며 "20대 국회에서 특별법 개정 운동에 나서겠다"고 말했다.

태어난 지 20일 만에 몸이 아파 부모 품에 안겨 병원에 가게 된 김형률 씨는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자신을 괴롭힌 아픔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김씨는 2002년 우연히 원폭 피해에 관한 의사 논문을 보게 되면서 비로소 원폭 피해자인 어머니를 떠올렸다.

그가 앓아왔던 병명은 선천성 면역글로불린결핍증. 원인은 원폭이었다.

백혈구 이상으로 면역체계가 약해져 조그만 감염에도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희소난치병이다.

몸무게 37㎏의 가냘픈 몸이었던 그는 '커밍아웃'을 하고 원폭 2세 피해자들의 인권운동을 펼쳤다.

김씨의 노력에 2004년 원폭 1세와 2세들의 기초 현황과 건강실태조사가 시행됐고, 김씨는 환우 500여명을 찾아내 이들의 인권운동에 매진하게 됐다.

김씨는 1974년 당시 보건사회부가 원폭피해의 중대성을 알고 400병상의 규모의 병원을 짓는 것을 추진했지만 외교부가 이를 폐기처분했다는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원폭 2세 환우회 초대회장으로 김형률씨가 간절히 원한 것은 원폭피해 2세 환우들에 대한 지원이었지만 특별법이 통과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2005년 5월 29일 34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뒀다.

한국원폭2세피해자 김형률추모사업회는 28일 부산민주공원에서 김형률씨 11주기 추모제를 연다.

추모제는 박일헌 감독이 만든 추모영상, 활동 경과보고, 추모사, 추모글, 유족대표 인사, 헌화와 분향, 영락공원 참배 순으로 진행된다.

일본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피해를 당한 한국인은 총 7만여명으로 현재 생존한 피폭 1세대는 2만6천여명에 달한다.

원폭피해 2세대는 2천300여명으로, 이 가운데 김씨처럼 유전적 피해를 입은 2세 환우는 1천350명 정도다.

(부산연합뉴스) 김선호 기자 win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