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향년 85세로 서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4차례 대선 출마와 6선 국회의원 등 현실정치인의 길을 걸으면서 갖게 된 무수한 기록 외에도 해방 후 첫 수평적 정권교체와 남북정상회담, 노벨상 수상에 이르기까지 민주화 투쟁과 통일운동에 평생을 보내며 역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를 세웠다.

김 전 대통령이 남긴 가장 큰 정치사적 업적은 지난 1997년 대선에서 당시 집권당이었던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꺾으면서 헌정사상 처음으로 야당으로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뤘다는 것이다.

선거를 통한 여야간 정권교체는 대한민국 민주화에 화룡점정(畵龍點睛)의 사건이었다. 지난 1960년대 산업화 이후 40년 가까이 한국 사회 깊숙이 뿌리내린 기득권층의 완고한 저항을 평화적으로 극복한 사례였기 때문이다.

김 전 대통령은 정당사, 특히 야당사에 다른 정치인과 비교할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대부분은 '보수냐 진보냐'는 정체성이 아닌 지역정서에 기반했던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아직도 야당은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가 남긴 최대의 오점은 1987년 대선 불출마 공약 번복과 야권 후보단일화 실패였다. 김 전 대통령은 1987년 '이민우 파동'으로 신민당을 탈당, 민주화 동지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통일민주당을 창당했으나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 호남을 기반으로 한 평민당을 창당, 민주진영을 갈라놓았다.

김 전 대통령은 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이 3당 합당에 참여하자 민주당, 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 등 선거 때마다 야당의 간판을 바꾸며 보수층에 맞섰다. 1987년 야권 분열 이후 야당사를 사실상 혼자서 써나간 셈이다.

김 전 대통령의 가신그룹인 동교동계도 야당사에 남다른 흔적을 남겼다는 평가다. 동교동계는 김 전 대통령이 대권을 잡으면서 측근정치의 폐해를 상징하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갖게 됐지만, 군사정권 시절 김영삼 전 대통령의 가신 그룹인 상도동계와 함께 제도권 내 민주화운동의 양대 축 역할을 맡았다.

김 전 대통령이 후배 정치인들에게 미친 영향도 상당하다. 특히 '정치9단'으로 불릴 만큼 그의 전략적 사고는 후배 정치인들에게는 바이블이 되고 있다.

지난 1997년 대선 당시 한국 정치에서 생소했던 연정(聯政)이란 개념을 활용해 성사시킨 충청도와의 지역연대는 아직까지도 여러 정파에게 매력적인 집권전략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정치인의 최대 덕목으로 꼽히는 연설의 대가이기도 했다. 맞수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감성에 호소하는 연설로 한시대를 풍미했다면, 김 전 대통령은 감성적이면서도 논리에 기반을 둔 설득형 연설로 '연설의 달인'이란 별명을 얻었다.

'포스트 DJ'의 선두 주자격인 무소속 정동영 의원을 비롯한 상당수 야당 정치인들의 연설 속에서 김 전 대통령의 목소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한경닷컴 박세환 기자 gre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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