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오전 8시,서울에서 파주시로 이어지는 자유로는 출근 차량들로 번잡했다. 서울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도로만 붐비던 몇년 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문 차량 행렬은 자유로에서 파주시로 진입하는 길목까지 이어졌다.

파주시청에서 멀지않은 한 식당에 들어가 아침 식사를 주문하며 지역 경기부터 물었다. 금릉역 인근에서 20년 넘게 식당을 운영해 온 김영남씨(59)는 "예전에 그렇게 많던 군인들이 요즘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파주 토박이인 김씨는 2000년 초반까지만 해도 식당에는 주말마다 군인들로 가득찼지만 요즘은 젊은 회사원 가족들이 매출을 올려주고 있다고 했다. 안정적인 소득계층들이 자리잡으면서 테이블당 매출 단가가 올라가고 식당과 주변 분위기도 한결 밝아졌다고 즐거워했다.

'괄목상대(刮目相對 · 눈을 씻고 봐야 할 정도로 발전한 양상)'라는 단어는 파주시의 변화에 딱 들어맞는다. 50년 넘게 미개발지역으로 남아있던 이곳에 LG의 디스플레이 클러스터를 비롯한 다양한 기업체들이 속속 입주하면서 수도권 북부의 최대 산업도시가 영글어 가고 있는 것이다.

◆군사도시에서 기업도시로

파주시는 대표적인 군사도시였다. 휴전선과의 거리가 10㎞ 정도에 불과한 데다 인근에 뚜렷한 산업기반도 없어 영세한 농업과 상업,군인들을 상대로 한 일부 서비스업으로 근근이 도시의 명맥을 유지해왔다. 수도권 인접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파주시 면적의 92.7%는 군사시설 보호구역으로 묶여 있다. 하지만 좀처럼 변할 것 같지 않던 군사도시의 하드웨어도 민간에서 밀려든 투자의 물결 앞에서는 속절없이 부서져 나갔다.

LG는 2004년부터 지금까지 디스플레이 클러스터에 7세대 공장 5조3000억원을 포함해 총 9조원가량의 투자를 단행했다. 그동안 지역 내 제조업체는 450여개,도소매업 등 유통업체는 550여개,숙박 음식업 등의 서비스업체 숫자는 270여개가 각각 불어났다. 경기개발연구원은 향후 LG전자 LG이노텍 LG화학 등의 디스플레이 연관사업장이 속속 들어서는 클러스터가 완성될 경우 15조3158억원의 생산유발 효과와 9만835명의 고용유발 효과가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변화는 이뿐만이 아니다. 대학들도 속속 파주시로 향하고 있다. 두원공대가 캠퍼스를 조성해 LCD 관련 전문학과를 개설한 데 이어 이화여대도 과거 미군 부지가 있던 월롱면 영태리에 교양수업을 위한 학교 단지와 교육연구 복합단지를 건설하기로 했다

파주시가 수도권 산업지도 변화를 주도하게 된 것은 뛰어난 접근성을 제대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서울과 인천공항으로 연결되는 자유로가 있고 자유로와 이어지는 외곽순환도로도 개통됐다. 여기에 제2자유로(서울 상암~파주 운정신도시)와 서울~문산 간 고속도로 건설도 추진 중이다. 파주시 관계자는 "옛날에 파주가 뉴스에 나오던 때는 태풍으로 인한 침수피해가 났을 때와 군사 시설 관련 이슈가 불거졌을 때밖에 없었다"며 "요즘은 LG의 공장 증설과 연구단지 입주 등이 주요 뉴스로 다뤄지면서 지역민들도 놀라고 있다"고 말했다.

◆자족도시로의 발걸음

파주시는 거대한 교하신도시를 갖고 있지만 더 이상 서울의 베드타운 역할에 만족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디스플레이 클러스터를 통해 지역의 대표산업을 육성하는 데 성공했고 초등학교부터 대학교에 이르는 종합교육체계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인프라도 어느 정도 갖춘 만큼 명실상부한 자족도시로 발돋움하겠다는 복안이다.

실제 파주시의 인구는 2003년 24만4000명에서 2008년 31만9395명으로 증가했다. 2000년 37개였던 초등학교는 2009년 50개로 늘어났고 중학교는 15개에서 19개로,고등학교는 10개에서 13개로 증가했다. 당동지구에는 이미 할인점 홈플러스가 들어와 있고 2010년에는 명품 아울렛인 신세계 첼시가 파주에 문을 연다.

세수가 늘어나니 파주시의 재정자립도도 한결 높아지고 있다. 2005년 40.7%이던 재정자립도는 2008년 53.6%로 뛰어올랐다. 파주시 금촌면에 살고 있는 직장인 김종경씨(48)는 "중학생과 고등학생인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서울로 이사가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최근 들어 주변 여건이 너무 좋아져 그냥 눌러살기로 했다"며 "LG그룹 임직원들의 입주가 본격화되면 도시의 교육 인프라는 더 호전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기업의 시간은 '돈'

변신을 이끄는 것은 기업만이 아니다. 파주가 기업하기 좋은 도시로 손꼽히는 이유는 '스피드 행정'이라는 지자체의 강력한 후방지원 때문이다.

파주시는 LG디스플레이가 본격적인 공장 가동을 시작하는 시점에 맞춰 늑장 행정의 고질병을 뿌리뽑는 데 나섰다. 2005부터 2008년까지 발생한 민원의 법정 처리기간과 실제 처리기간을 비교하면 공장설립은 평균 7일에서 3일,건축허가는 14일에서 6일,개발행위는 15일에서 5일로 각각 단축됐다. 민원신청서를 종류별로 다른 창구에서 처리하던 것을 통합민원 창구 하나로 단일화했다. 2008년 3월 이화여대가 파주 캠퍼스의 사업승인 신청을 했을 때는 단 하루 만에 승인을 내줘 전국 지자체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기도 했다.

LG디스플레이 사업장이 입주하는 과정에선 아예 공장 안에 출장 민원실을 차려 3000여명의 전입신고를 받았고 시청 직원들이 직접 고등학교를 방문해 만 17세가 된 학생에게 주민등록증을 발급하는 서비스도 펼쳤다.

이기상 시정정보화 담당관은 "모든 직원들이 시간은 '돈'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며 "기업 입장에서 모든 의사결정을 하기 시작한 뒤로는 일처리가 늦어 시청으로 달려오는 민원인들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파주=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