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재 의원을 비롯한 한나라당의 지방행정 전문가 그룹이 이회창 당시 대선 후보와 세종시 문제를 놓고 머리를 맞댄 건 16대 대통령 선거를 2개월여 앞둔 2002년 10월.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행정수도 이전' 공약을 내걸고 충청권 바람몰이를 시작하고 나선 데 대한 대응책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당시 건국대 교수였던 이 의원은 이 후보의 사회부문 자문위원을 맡았다.

행정수도 이전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나가는 이 의원의 설명을 찬찬히 듣던 이 후보가 말문을 열었다. "나도 충청도 출신이지만 행정수도 이전은 말이 안 돼.현실성이 없을 뿐더러 내려가더라도 행정 비효율만 야기하겠지.자문위원들 말씀대로 디즈니랜드와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충청권에 유치하는 게 현실적인 대안이 되겠군."

이 후보는 그렇게 16대 대선 레이스가 끝날 때까지 행정수도 이전 반대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랬던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가 이제 '세종시 전도사'로 변신해 자신이 만든 '행정수도 이전 불가' 논리를 고수하는 한나라당을 압박하는 것은 한국 정치의 아이러니다. "정부 부처 이전 백지화는 충청의 자존심을 짓밟는 일"이란 지역 민심을 확인한 마당에 '정치인 이회창'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후 여 · 야 합의로 세종시 건설 법안이 통과됐고 이미 상당부분 건설이 진척돼 7년 전과 상황은 달라졌지만 그럼에도 많은 사람은 원칙주의자인 이 총재의 변신에 의아해하고 있다. "정치논리,지역논리 앞에선 '대쪽'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그만큼 세종시 문제가 '충청을 버리느냐,마느냐'하는 정치 · 지역 이슈로 변질됐다는 얘기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말 바꿨다

말을 뒤집은 이는 이 총재만이 아니다. 행정수도 이전계획을 관철시킨 노 전 대통령도 한때 행정부 이전을 반대하는 입장에 섰었다. 노 전 대통령이 김대중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맡고 있던 시절.부산 유지들이 해양부 부산 이전을 건의하자 그는 "장관 취임 한 달 동안 39번의 외부 일정을 소화했는데 3분의 2는 국회,정당,국무회의,청와대 방문이었다"며 "해양부를 옮기면 장관은 거의 서울 사무소에 머물게 될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랬던 노 전 대통령이 행정수도 이전을 밀어붙인 건 지역분권의 가치를 행정업무의 효율성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겠지만,정치 구도나 역학관계의 변화를 좇아 말을 바꾼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들끓는 충청 민심

세종시를 바라보는 충청도민의 마음은 답답하기만 하다. 도대체 '한다는 건지,만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공사판 흙먼지로 뒤덮인 세종시 건설현장만 보면 '이제 와서 어쩌겠어'란 생각이 들지만,이전 관련 행정절차를 미루고 있는 정부 · 여당을 보면 '설마…'하는 의구심을 감출 수 없다.

실제 '○○부처를 세종시로 옮긴다'는 내용을 관보에 싣는 '정부부처 이전 고시'는 뚜렷한 이유 없이 늦춰지고 있다. 세종시의 법적 지위(광역시 또는 기초자치단체) 부여 문제는 아직도 국회를 통과하지 못한 상태다. 여기에 김문수 경기도지사와 차명진 의원 등 여권 인사들은 잊을 만하면 한번씩 "세종시는 망국의 길이다. 원점에서 다시 검토해야 한다"며 충청인을 자극한다.

"시간을 질질 끌면서 세종시의 성격을 변질 · 축소하려는 술책"(홍석화 행정도시 사수 연기군 대책위원회 사무국장)이란 말이 충청도민 사이에서 나오는 이유다. 홍 국장은 "현 정부가 충청도를 실망시킨 만큼 4대강 살리기 등 정부정책에 대한 전반적인 반대투쟁을 벌이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명수 자유선진당 의원은 "충청도에선 '정권이 충청을 너무 우습게 본다. 영남이나 호남에 세종시를 건립하기로 했다면 이렇게 하겠느냐'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며 "이명박 정부가 돌아선 충청 민심을 다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당초 계획 그대로 세종시 사업을 진행하는 것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공무원은 "설마 내려가겠어?"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과천청사에 근무하는 공무원 가운데 3년 뒤 세종시로 이주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세종시에 가장 먼저 들어가야 할 당사자인데도 이들이 걱정하지 않는 이유는 딱 하나. "세종시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청와대가 언젠가 직접 나서 행정수도 이전을 막아줄 것"이란 기대심리 때문이다.

묘하게도 요즘 과천청사에선 이런저런 공사가 진행 중이다. 14억원을 들여 스프링클러 공사를 마친 데 이어 2011년까지 50억원을 투입한다는 계획 아래 화장실을 뜯어고치고 있다. 7억원이 드는 창문 교체작업도 착착 진행되고 있다. 공무원 자녀들을 위해 만든 28억원짜리 어린이집도 조만간 문을 연다.

과천청사 측은 "안전 등 개 · 보수 필요성 때문"이라지만 3년 뒤에 보금자리를 옮길 '집 주인'이 벌이는 공사치고는 규모가 큰 게 사실이다. 오히려 "과천 공무원들 사이에 '세종시로 떠나지 않을 것'이란 공감대가 형성된 결과가 이렇게 나타난 것"이란 해석에 손을 들어주는 사람이 많다.

#행정부 이전을 바라보는 상반된 관점

세종시 문제가 정치 이슈로 변질되면서 정작 논의의 핵심인 정부 부처 충청권 이전의 득실에 대한 냉철한 분석은 뒷전으로 밀리는 모양새다.

"세종시를 행정수도가 아닌 '과학 및 교육 수도'로 바꾸자"는 한나라당 일부와 학계 일각의 주장도 공허한 메아리로 남을 뿐이다. 이들이 세종시에 행정수도 기능을 빼자는 이유는 간단하다. 주요 부처가 내려감으로써 발생하는 행정 비효율이 '지방 분권 및 지역 경제 활성화' 등 부처 이전의 긍정적인 효과를 압도한다는 것이다.

이은재 의원은 "정부 부처를 이전해도 밥집 몇 개 빼곤 따라갈 산업이 없는 만큼 '실속 없는' 행정수도를 포기하는 대신 과학 및 교육수도로 바꿔 대기업이나 명문대를 유치하는 게 지역 경제에 훨씬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반면 충청도민과 야당은 정부 부처 입주가 세종시를 살리는 첫걸음이라고 입을 모은다. 일단 1만2000명에 달하는 중앙 부처 공무원과 산하단체 임직원들이 입주해야 기업 병원 대학 연구소 등도 이들을 보고 따라 들어온다는 이유에서다.

김종률 민주당 의원은 "세종시에 과학 교육 산업 기능을 보완해 자족 기능을 끌어올리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며 "국내외 대기업과 대학을 유치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 이것이 행정부 이전 포기의 반대급부가 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오상헌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