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에서 날아온 생존가족의 소식에 전국의 이산가족들은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반세기를 눈물로 지새웠던 이산가족들은 뜻밖의 소식에 가슴속에 묻어놨던 부모,형제에 대한 희미한 기억들을 다시 떠올리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빛바랜 사진첩을 챙기면서 벌써부터 상봉의 꿈에 부풀어 있는 모습들이었다.

그러나 방북신청에서도 탈락하고 북에서도 소식을 받지 못한 이산가족들은 헤어진 형제자매를 그리며 또다시 눈물을 삼켰다.


<>.북한의 인민배우 박섭(74)씨가 찾고 있는 막내 동생 병련(63.양천구 목동)씨는 "부모님 제사 때면 항상 맏상주인 형님 생각에 눈물로 지냈다"며 "세 딸들이 이제는 큰 아버지께 인사라도 드리고 가족된 도리를 다할 수 있게 돼 한없이 기쁘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박섭씨는 월북전 연극단 "신향"의 배우였으며 북한에서 "처녀 이발사" "우리에게도 조국이 있다" 등의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북한에서는 최고의 영화더빙 전문성우로도 알려져 있다.

현재 인민배우이며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로 70년대에 조선번역영화제작소 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동생 병련씨는 "막내로 태어나 어린시절 큰 형의 연극 연습장에 따라 다니는 등 귀여움을 독차지했었다"며 "큰 형님을 만나는 순간까지 한잠도 자지 못할 것 같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신상철(71.서울 강남구 개포동)씨는 북측이 보내온 명단에 둘째 형수 김점순(67)씨의 이름이 올라있는 것을 보고 둘째형 영철(74)씨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다.

강원도 안변에 살던 신씨 형제는 지난46년 음악공부를 위해 서울로 와 서울관현악단 등에서 활동하다 49년 헤어진 채 남과 북에서 각자의 길을 걸어왔다.

상철씨는 57년 대한민국 종합예술단이 첫 해외 순회공연을 가졌을 때 독주자로 참가하기도 한 경음악계의 "원로".

영철씨는 북한에서 작곡가로 왕성한 활동을 펼쳐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상철씨는 "7,8년전 하와이에 사는 지인을 통해 형이 평양대극장장이 됐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혹시나 폐가 될까봐 접촉해 볼 생각도 못했다"고 말했다.


<>.북한 최고의 미술창작사인 만수대창작사 조선화창작단 화가로 활동하고 있는 정창모(68)씨의 여동생 남희(53.전주시 효자동)씨는 오빠의 생존소식을 전해듣고 "그동안 기회닿는 대로 오빠의 그림들을 사 모았다"면서 감격해했다.

남희씨는 "너무 어렸을때 헤어져 얼굴이 기억나지 않아 그림을 보며 오빠의 모습을 상상해보곤 했다"면서 "이제 오빠의 얼굴을 직접 만져보고 싶다"고 말했다.

창모씨는 6.25때 의용군에 입대,월북한뒤 김일성 주석의 집무실인 금수산의사당(현재 금수산기념궁전)에 걸려있는 "비봉폭포의 가을"을 완성,공훈예술가와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이산가족중 상당수가 각각 국군과 인민군으로 입대,총부리를 겨눴던 것으로 밝혀져 "가족 상잔"의 비극을 실감케했다.

주영관(72.전 국회의원.서울 마포구 도화동)씨는 북쪽 이산가족 명단에서 동생 영훈(69)씨의 이름을 확인하고 기쁨과 함께 기구한 운명을 다시 떠올렸다.

동생이 의용군으로 차출된 다음해 자신은 국군 연락장교로 입대했기 때문.

주씨는 "혹시라도 형제끼리 전쟁터에서 만나지나 않을까 조마조마했다"며 "아픈 기억"을 털어놨다.

임신 3개월된 부인 유순이(71)씨를 남겨놓고 의용군에 끌려간뒤 50년만에 부인과 아들을 만날 희망을 갖게된 북쪽의 김중현(69)씨도 비슷한 경우.중현씨는 6.25전쟁 발발 직후 형 국현씨를 대신해 의용군으로 차출된 뒤 월북했다.

국현씨는 1년 뒤 국군으로 참전,전사했다.

장유택 기자 changy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