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아직 갈길 먼 가업승계
살다 보면 현실이 더 드라마 같을 때가 있다. 선친의 기업을 승계했다가 까다로운 상속제도에 묶여 끝내 파산에 이르게 된 고혜진 씨가 그런 예다. 고씨가 원단 제조업체 ‘고원니트’를 물려받은 건 2013년. 상속세를 공제받는 대신 관련 법에 따라 10년간 사업을 지속하고 고용인원을 유지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상속 7년 차에 접어들었을 무렵 느닷없이 코로나가 닥쳤다. 경기가 얼어붙어 인건비를 감당하기 어려웠지만, 가업상속공제 요건에 묶여 불가능했다.

까다로운 상속제도에 묶여 좌절

힘겹게 버티던 고씨는 2020년 10월 승계를 포기하고 파산을 택했다. 그동안 공제됐던 상속세는 페널티 성격의 가산세까지 붙었다. 그는 수억원을 토해내야 했다. 이 과정에서 고씨는 집을 팔고 단칸방 셋집으로 옮겼다. 파산 절차가 진행되면서 고씨는 회사의 연대보증 책임까지 떠안아 지난달 개인파산이 선고됐다. 고씨의 절박한 사례는 국회에도 알려지면서 가업승계 관련 세법이 개정되는 계기가 됐다.

정부는 그동안 가업상속공제 요건 중 승계 이후 가업 영위 기간을 10년에서 5년으로 줄이고, 상속공제 및 증여세 과세 특례 대상을 넓혀 매출 5000억원 미만의 중견기업도 포함했다. 일본의 상속제도를 참고해 상속세와 증여세 납부를 일정 기간 유예해주는 방안도 최근 도입했다. 이런 개선안이 조금 일찍 도입됐다면 고씨는 파산이라는 최악의 상황까지 내몰리지 않았을지 모른다.

기업들은 이제 뒤늦게나마 승계 스트레스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직은 갈 길이 멀다는 게 중론이다. 최근 상속제도 개선 방안이 진일보한 건 사실이지만 여전히 험난한 장애물이 적지 않아서다. 무엇보다 중소기업에 비해 혜택의 폭이 제한된 중견기업의 사정이 암담하다는 게 문제로 꼽힌다.

'부의 대물림' 인식도 바뀌어야

국내 중견기업은 2021년 기준 5480개다. 총매출은 852조원, 고용인원은 159만 명에 이른다. 이들 기업 가운데 평균 매출 연 5000억원이 넘는 기업은 가업상속공제 대상에서 제외된다. 상속세 및 증여세 납부를 유예할 수 있는 대상에는 아예 모든 중견기업이 빠져 있다. 세액 자체가 중소기업보다 월등히 많은 중견기업의 시름은 여전히 깊을 수밖에 없다.

가업상속공제의 취지는 세금을 줄여서라도 기업의 영속성을 높이고 투자를 늘려 경제 성장을 돕자는 데 있다. 이런 논리라면 중소기업보다 규모가 크다고 중견기업에 대한 혜택에 인색할 이유는 없다. 중견기업은 더구나 수출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곳이 많다. 정부의 자의적인 ‘선 긋기’는 오히려 ‘피터팬 증후군’을 조장할 수 있다.

상속이 이뤄지는 가족기업을 ‘부의 대물림’이라는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고리타분한 사회적 인식도 바뀔 때가 됐다. 경제학 분야 세계 최고의 저널로 꼽히는 <아메리칸 이코노믹 리뷰>(2010년 10월)에 따르면 전 세계 상장회사의 45%가 가족기업이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중시하는 미국에서조차 S&P500지수에 편입된 기업의 3분의 1, 포천 500대 기업의 37%가 가족기업이다. 한국에서만 유별나게 가업승계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가정의 달을 맞아 가업승계의 의미를 되새겨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