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반도체 그만두고 싶다"…후퇴한 'K칩스법'에 커지는 中企 한숨
“반도체 관련 중소기업이 가장 바라는 것은 정부 지원이 아닙니다. 대기업 투자가 활성화돼 자연스럽게 사업 기회가 늘어나길 원하지요.”

지난 23일 소위 ‘K칩스법’이 통과됐다는 소식을 접한 한 반도체 중견기업 A 임원은 “이번 정부도 별수 없다”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A 임원만의 얘기가 아니다. 반도체 관련 소재·부품업체 사이에선 “정치권이 한국 반도체 기업을 역차별하는 것”이라는 날 선 비판을 접하는 게 어렵지 않다.

여야는 반도체 등 국가 첨단산업 설비투자 세액공제율을 대기업 8%, 중견기업 8%, 중소기업 16%로 정하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반도체 시설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는 한국 기업이 미국, 대만, 중국 기업과의 경쟁에서 불리하지 않도록 지원하는 것이 핵심이다.

세액공제 폭이 당초 여당이 추진한 것의 절반에도 못 미치면서 오히려 주요 경쟁국보다 크게 뒤처지는 결과가 됐다. 여당은 2030년까지 대기업, 중견기업, 중소기업의 반도체 시설투자 세액공제 폭을 20%, 25%, 30%로 높이는 법안 개정을 추진했다. 그런데 당초 야당 안(각 10%, 15%, 30% 세액공제)보다 후퇴해 대기업 공제 폭만 현행보다 2%포인트 높이는 데 그쳤다. 짐을 덜긴커녕 혹만 붙인 셈이 됐다.

문제는 이런 시대 역행적인 조치의 피해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같은 대기업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제 혜택 축소로 반도체 대기업이 지갑을 닫으면 그 피해는 중소기업으로 번질 수밖에 없다.

중소기업 B 대표는 “대기업이 투자를 줄이면 각종 비용이나 프로젝트 연기 및 파기 같은 기회 상실 등의 손해는 고스란히 밑으로(중소기업) 내려오게 돼 있다”고 우려했다. 또 다른 C 대표는 “해외는 세액 감면을 강화하는데 한국 정부는 한국 기업을 역차별하고 있다”며 “자본과 기술이 해외로 빠져나가면서 국내 반도체 중소업체들의 설 자리는 더더욱 없어지고 말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곳곳에서 “반도체 사업 그만하고 싶다”는 아우성만 쏟아진다.

그동안 역대 정권은 반도체 산업을 키운다며 인력 양성,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생태계 조성, 규제 완화, 세제 혜택을 경쟁적으로 주장했다.

하지만 실제 행동은 산업을 살리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번에도 ‘대기업 감세를 막겠다’는 야당의 단견, 세수 확보에 눈먼 정부의 욕심이 황금알을 낳는 반도체 생태계의 배를 가른 것은 아닐지 걱정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