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식 칼럼] 대북 정책, 업적에 연연하지 말아야
북한에서 2016년 출간된 《야전열차》는 김정일과 김정은의 핵무기 개발 의도와 목적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 책은 김정일이 그의 전용 열차에서 아들 김정은과 주고받은 대화를 기록한 체제 선전용이다. 김정일은 “핵무기 보검을 틀어쥐었는데 미국 따위가 감히 뺏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김정은은 “핵국가 대 핵국가가 직접 맞붙지는 못했다. 핵 억제력만이 우리의 존엄을 지켜줄 것이다. 기어이 미국의 야망을 꺾겠다”고 맞장구쳤다.

1954년부터 핵무기 개발을 밀어붙인 김일성이 “핵은 우리를 지켜줄 정의의 보검”이라며 “반드시 핵무기를 만들어내라”고 한 유훈대로다. 북한은 2012년 헌법 서문에 ‘핵보유국’이라고 못박았다. 노림수는 뻔하다. 세습 독재를 정당화하는 선전용으로 그만이다. 대외적으로는 미국과 동등한 지위에서 핵 군축 협상을 벌여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고 주한미군 철수 카드를 꺼내 들겠다는 속셈임을 모를 수 없다. 유사시 핵 위험이 있는 한반도에 미군 증원을 꺼리게 하고, 재래식 군사력 열세를 만회해 남북한 협상을 주도할 수단으로도 써먹을 수 있다. ‘핵그림자 효과’다.

북한이 핵보유국 목표 달성을 위해 온갖 기만전술을 동원한 것은 익히 알려진 바다. 지난 30년 동안 ‘벼랑 끝 전술’, 협상을 잘게 쪼개 하나씩 성취하는 ‘살라미 전술’, 남남 갈등을 일으키는 ‘이간계’ 등을 적절하게 활용했다. 제네바 합의(1994년)와 9·19 공동성명(2005년), 2·13 합의(2007년), 2·29 합의(2012년) 등은 북한의 이런 속임수들로 점철된 결과물이다.

매번 동결과 ‘단계적 동시 조치’라는 미봉에 그쳤다. 북한은 핵시설 동결, 사찰, 검증으로 나눈 뒤 잘게 쪼개 협상하면서 동결 수준에서 지원만 받고 검증 단계 직전 한·미 탓으로 돌리며 합의 파기를 밥 먹듯 되풀이했다. 한·미가 농락당한 것은 북한의 사기극을 꿰뚫어 보지 못했다기보다 임기 내 업적에 매달려 벼랑 끝 위기 탈출에 급급해 ‘작은 합의’에 만족했기 때문이다.

감성적 평화주의에 물든 남북한 정상회담은 악수 사진 말고 남은 게 없다. 그 결과로 나온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은 김정일 통치자금 ‘ATM(현금자동입출금기)’ 역할을 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 탄생한 판문점 공동선언, 평양 공동선언도 핵·미사일 개발 시간 벌기용이 됐고, 그 결과 우리 국민은 북한의 핵을 이고 사는 지경에 이르렀다.

윤석열 정부가 “북한 달래기 시대는 끝났다”며 원칙적 대응을 천명한 것은 다행이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 “국제사회와 협력해 북한 경제와 주민들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담대한 계획을 준비하겠다”고 한 취임사 내용이다. 물론 ‘북한이 핵 개발을 중단하고 실질적 비핵화로 전환한다면’이란 단서를 붙였다. 그러나 북한이 늘 써먹던 단계적 동시 조치의 연장선상인지, 검증은 어떻게 한다는 건지 등 단서의 세부 방안은 아직 뚜렷하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권영세 통일부 장관이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낸 다음 경제적 지원 등을 충분히 얘기하겠다”며 보상부터 덜컥 언급한 것은 섣부르다. ‘담대한 구상’ ‘담대한 여정’이라며 내놨던 역대 대통령들의 ‘베를린 선언’ ‘비핵·개방·3000’ ‘신한반도평화비전’ 등이 왜 휴지 조각이 됐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북한은 올 들어 핵·미사일 위협 수위를 바짝 끌어올리고 있다. 위기를 정점까지 고조시킨 뒤에 제재 모면을 위해 어느 순간 돌변해 협상 테이블로 불쑥 나오는 게 북한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미국까지 때릴 수 있는 핵미사일을 갖게 됐다며 요구 수준도 확 높일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어떤 일이 있어도 ‘만능의 핵보검’을 내려놓지 않을 것이라는 대전제를 늘 깔아둬야 한다. 그런 점에서 혹여라도 대북정책 업적을 내려 적당한 수준에서 북한의 가짜 올리브 가지를 덥석 무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 윤석열 정부만큼은 ‘도발→협상→보상→파기’라는 북한의 살라미 전술 고리를 확실히 끊어내야 한다. 불가역적 수준의 핵시설 전면 폐기(CVID)와 핵 불능을 끌어내야 함은 물론이다. 비핵화 단계마다 철저한 검증은 필수다. 지원은 그다음 절차여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북핵 인질’ 탈피는 요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