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식 칼럼] '개딸'과 '양아들' 그리고 민주주의
드라마 ‘응답하라’에서 아빠 말끝마다 어깃장을 놓는 얄미운 딸을 지칭하는 ‘개딸’이 정치판에 처음 차용됐을 땐 욕설인가 싶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총괄선대위원장의 2030 여성 지지층을 일컫는 ‘개혁의 딸’의 줄임말이란 것을 알았을 때의 당혹감이란…. 이게 끝이 아니다. 개이모, 개삼촌, 양아들(양심의 아들) 등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

정치 팬덤화를 상징하는 용어들이 점점 거칠어지고 있다. 원조 격인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는 신사 축에 속한다. 말은 품격을 나타낸다. 거친 용어 속에서 증오의 정치를 보는 듯하다. 이런 팬덤이 거대 야당의 일상 작동 기제로 자리 잡은 것은 위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팬덤의 등장은 민주주의 진전의 결과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배타적, 독단적 이데올로기로 치달을 땐 민주주의에 큰 해악이 된다. 정치인을 주권자의 대리로 여기고 합리적 판단에 따라 언제든 지지를 바꿀 수 있는 게 민주주의의 요체다. 어떤 지도자도 무오류일 수 없기에 그렇다. 그런데도 특정 지도자를 우상처럼 여기는 것은 전근대적 부족사회에나 있을 법하다. 한나 아렌트는 권력의 무오류성에 대한 집착과 신화가 전체주의를 부른 원인이라고 비판했다.

팬덤 정치는 대의민주주의를 망가뜨린다. 최장집 교수의 지적대로 팬덤은 자신들의 의지를 의원이 아니라 지도자를 통해 직접 표출한다. 정당정치는 무너지고 의회는 통법부가 된다. 민주당 상황이 딱 그렇다. 다양한 이해를 조율하고 통합하는 게 정치인데, 배타적, 공격적인 팬덤에 당이 장악된 듯하다.

그 사례는 넘친다. 금태섭 전 의원 등 ‘초선 5적’과 같이 ‘좌표’에 한 번 찍혀 조리돌림당하면 살길을 찾기 힘들다. 지난해 5·2 전당대회는 극성 팬덤의 문자폭탄 옹호 경연장을 방불하게 했고, 최고위원들은 이들의 지지를 업은 강성들이 차지했으니 ‘원 웨이’밖에 있을 리 없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법 등을 완력으로 처리한 막후에도 팬덤이 버티고 있었다. 절차적 민주주의조차 안중에 없고, 당은 강성 팬덤의 전위대 같다. “이건 아닌데”라며 검수완박에 반대를 외친 의원들도 막상 팬덤의 문자폭탄이 두려워 모조리 찬성표를 던진 것을 보면 처연하다.

민주당 국회의장 경선이 강성 지지층에 대한 충성 경쟁장을 방불하게 하는 것은 의회민주주의의 수치다. 국회의장 후보들이 단골로 내세운 협치라는 말은 예의상으로도 한마디 언급이 없다. 합리적이란 평가를 받던 김진표 의원마저 “제 몸에 민주당의 피가 흐르고 있다. 윤석열 정부를 강하게 견제하는 일이 민주당의 운명”이라고 했다. 검수완박법 처리 때 법사위 안건조정위원장을 맡아 공을 세운 것을 훈장으로 내세울 정도이니 정치 중립, 중진의 품격은 사치가 돼 버렸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5년 전 댓글 폭력에 대해 “경쟁을 더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양념”이라고 ‘면허’를 줘버렸으니 이들에게 책임 윤리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연목구어’다.

‘개딸’ ‘양아들’에 대해 그 아빠인 이재명 위원장이 “세계사적인 의미가 있는 새로운 정치 행태” 운운한 것도 어이없다. 민주사회에선 누구든 정치 지도자를 적극 지지할 수 있다. 하지만 정치 지도자와 지지자를 ‘부모와 딸’로 규정하는 것은 비정상이다. ‘응답하라’에선 아빠에게 대들기라도 한다. 하지만 “재명 아빠, 잼파파 사랑해요”라고 하트를 날리고, 서로를 가족 같다며 ‘가좍’이라고 부르는 상황에서 건설적 비판이 어떻게 가능하겠나.

지도자와 지지자가 부녀, 부자 관계로 치환돼 순종적 관계만 존재한다면 민주주의의 조종(弔鐘)이요, 정치 타락이다. ‘어버이 수령’을 연상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양향자 무소속 의원이 민주당 복당 신청을 철회하면서 “지금 ‘개딸’에 환호하는 민주당의 모습은 슈퍼챗에 춤추는 유튜버 같다”는 일갈은 민주당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묘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