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뉴욕하면 어떤 게 떠오르시나요? 초고층 건물과 화려한 네온사인, 잠들지 않는 도시의 화려한 모습을 많이들 머리속에 그리실텐데요. 실제 맨해튼의 거리를 걸을 때 가장 많이 보이는 건 다름아닌 공사장에서 쓰는 비계입니다. 뉴요커들은 비계를 뉴욕시의 '가로수'라고 부를정도로 도시 곳곳에 비계가 포진해있습니다.

비계가 많다보니 도시 미관도 해치고, 어떤 길은 대낮에도 어두워서 무서운 분위기까지 풍기기까지 합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뉴욕 시장까지 나서서 불법 비계를 단속하겠다고 엄포를 놓고있는데요. 다른 나라의 대도시에선 흔히 찾아보기 어려운 비계가 유독 뉴욕에 많은 이유는 뭘까요? 오늘은 어느새 뉴욕을 상징하는 구조물이 되어버린 비계의 비밀을 파헤쳐보겠습니다.
뉴욕엔 왜 유독 '비계'가 많을까?…'골칫거리'된 속사정은 [나수지의 뉴욕리포트]

○서울-부산 왕복거리만큼 쌓인 비계

뉴욕에는 대체 얼마나 비계가 많을까요? 뉴욕시 통계에 따르면 맨해튼 내에 있는 비계는 총 8300개입니다. 건물을 둘러싼 비계를 직선으로 늘어뜨려놓으면 길이가 580km에 달합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직선거리가 대략 320km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뉴욕에 있는 비계를 이어두면 서울 부산을 거의 왕복할 수 있을만한 거리가 되는겁니다.

문제는 이런 비계들이 건물을 짓거나 보수할 때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뉴욕시를 덮은 비계 중 300개는 만들어진지 5년 이상 됐습니다. 비계가 설치된 평균 기간은 498일이나 됩니. 한 번 비계가 만들어지면 적어도 1년반은 유지된다는거죠.

맨해튼을 뒤덮은 비계는 도시 미관을 해치는 주범입니다. 공사용 파이프와 판자를 그대로 노출하고 있고, 비계 아래는 대낮에도 어두워서 조명을 달아둬야 할 정도입니다. 건물 1층에 입주한 자영업자들은 간판이 모두 가려져서 손님을 유치하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비계가 오래 방치되면서 비둘기가 몰려들고, 이 때문에 건물에 사는 사람들이 소음과 위생문제를 겪기도 합니다.

○뉴욕은 어쩌다 비계 천국이 됐나

그렇다면 다른 도시와 달리 뉴욕에 유독 비계가 많은 이유는 뭘까요? 물론 맨해튼은 아직도 활발한 도시 개발이 이뤄지는 지역입니다. 건설현장이 많으니 작업자와 보행자의 안전을 위한 비계도 많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비계가 꼭 필요한 이유외에도 뉴욕에 비계가 유독 많은 건 낡은 규정 때문입니다. 뉴욕시에는 외관 검사 및 안전 프로그램(Facade Inspections & Safety Program), 줄여서 'FISP'라고 하거나 법조항 번호를 따서 '지방법 11호'라고 부르는 법이 있습니다.
뉴욕엔 왜 유독 '비계'가 많을까?…'골칫거리'된 속사정은 [나수지의 뉴욕리포트]
이 법은 1980년대 만들어졌습니다. 1979년 바그너 대학을 다니던 그레이스 골드라는 학생이 뉴욕 건물 외벽에서 떨어진 벽돌 조각에 맞아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사건 이후 뉴욕시는 건물 외벽에 대한 규정을 처음으로 만들었고, 이후 1997년 매디슨 애비뉴에서 벽돌 벽이 무너지자 한 번 더 외벽과 관련한 규정을 강화해 지금과 같은 규정이 됐습니다.

건물 외관을 규정하는 뉴욕시의 법은 깐깐하기로 유명합니다. 법에 따르면 뉴욕시내 6층 이상의 모든 건물은 5년에 한 번 씩 뉴욕시가 공인하는 외벽 검사관에게 외벽을 검사받아야합니다. 일단 외벽을 검사할 때 최소 수개월 가량 비계를 설치해야합니다. 뉴욕 시에서 검사대상이 되는 건물은 1만6000개 가량입니다. 물론 뉴욕 시내 높은 건물이 늘어나고 있으니 검사를 받는 건물의 숫자도 매년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검사관은 건물을 세가지 범주 중 하나로 분류합니다. △안전 △수리하면 안전 △위험. 이 가운데 위험 등급을 받으면 바로 비계를 설치해 보행자를 보호해야합니다. 규정대로라면 90일 안에 수리를 완료해야하고 그게 어려우면 추가 90일을 연장해 총 180일 안에 문제를 해결해야합니다.

문제는 건물 외벽을 공사하는 것 보다 비계를 그대로 두는 게 훨씬 싼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뉴욕의 고층 건물 가운데는 오래된 것들이 많다보니 생기는 일입니다. 규정을 넘겨 비계를 불법으로 오래 유지할 때 드는 비용은 벌금 등을 다 합쳐도 연간 10만달러(약 1억3700만원) 수준입니다. 하지만 외벽을 수리하면 적어도 수백만달러 이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건물의 주인이 여러명이어서 의사결정을 하는데 시간이 오래걸리거나, 건물주가 영세하다면 외벽이 수리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게됩니다.
뉴욕엔 왜 유독 '비계'가 많을까?…'골칫거리'된 속사정은 [나수지의 뉴욕리포트]
또 다른 문제는 건물 외벽에 대한 규제가 백년이 넘은 벽돌 건물과 유리와 철강으로 지은 신축 건물에 똑같다는 겁니다. 건물의 외벽 종류나 건설 연도에 상관없이 동일한 규제가 적용되는거죠. 이 때문에 불필요하게 자주 외벽 검사를 받아야하고, 이 과정에서 비계가 자주 설치된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뉴욕시의 해결책은?

비계 문제는 뉴욕시에도 골칫거리입니다. 그래서 뉴욕시는 비계를 없애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먼저 경우에 따라 필수 외관검사 기간을 연장해주는 방안을 추진중입니다. 신축 건물에 대해서는 검사 주기를 5년보다 더 길게 잡고, 지난번 검사에서 외관 개조를 마친 건물도 다음 검사 시기를 미뤄주는겁니다.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건물에는 저금리 대출을 제공해 건물 외벽 수리가 빠르게 이뤄질 수 있도록 '당근'을 주고, 비계를 불법적으로 유지하면 벌금을 강화하는 '채찍'도 뉴욕시 정책의 일부입니다. 기왕 비계를 설치할거라면 도시 미관을 해치지 않도록 높고, 밝은 색상으로 비계를 만들자는 대안도 나옵니다.
뉴욕엔 왜 유독 '비계'가 많을까?…'골칫거리'된 속사정은 [나수지의 뉴욕리포트]
뉴욕시의 비계 문제는 하루 이틀이 아닌만큼, 새로운 뉴욕시장이 취임할 때 마다 새로운 비계 정책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뉴욕시가 '비계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요? 뉴요커들은 반신반의하고 있습니다.

뉴욕 = 나수지 특파원 suj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