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앙정가(俛仰亭歌)

인간 세상 떠나와도 내 몸이 겨를 없다.
이것도 보려 하고 저것도 들으려 하고
바람도 쐬려 하고 달도 맞으려 하니
밤일랑 언제 줍고 고기는 언제 낚고
사립문은 누가 닫으며 떨어진 꽃은 누가 쓸까.
아침이 부족하니 저녁이라 싫겠는가.
오늘이 부족하니 내일이라 넉넉하랴.
이 산에 앉아 보고 저 산에 걸어 보니
번거로운 마음에 버릴 일이 아주 없다.
쉴 사이 없거든 길이나 전하리라.
다만 푸른 지팡이만 다 무디어 가는구나.
(부분)


* 송순(宋純, 1493~1582) : 조선 중기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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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의 아침 시편] 50년간 벼슬하며 존경받은 비결
송순(宋純)의 ‘면앙정가’는 그가 41세에 관직에서 잠시 물러나 고향 전남 담양에 내려와서 지은 가사(歌辭)입니다. ‘면앙정(俛仰亭)’은 그가 지은 정자 이름이면서 호(號)이기도 하지요.

이 작품은 “반복·점층·대구법 등으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잘 살리고 경치 또한 실감나게 묘사한 절창”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첫 부분의 서사(序詞)에서는 면앙정이 있는 제월봉의 모습을 묘사했고, 두 번째 부분인 본사(本詞)에서는 면앙정에서 바라본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했죠.

사립문은 누가 닫고 떨어진 꽃은…

본사의 앞부분에서 시선을 먼 곳으로 점차 이동하며 근·원경, 뒷부분에선 면앙정의 사계 풍경을 그렸습니다. 마지막 결사(結詞) 부분은 ‘이렇게 지내는 것도 모두 역군은(亦君恩: 역시 임금의 은혜)이샷다’라며 유학자로서의 충절을 표하고 있군요.

위에 인용한 부분은 ‘면앙정가’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구절입니다. 우리말의 묘미를 절묘하게 살려냈다는 평을 듣지요. 속세의 번거로움에서 벗어났지만 자연을 향유하느라 한가로울 겨를이 없다는 대목이 시인의 내면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런 중에 달도 맞아야 하고 알밤도 주워야 하며 낚시도 해야 하는데 사립문은 누가 닫으며 떨어진 꽃은 누가 쓸 것인가 하고 익살스레 묻습니다. 벼슬할 때의 바쁜 일과보다 전원의 느긋한 즐거움이 더 크다는 얘기지요.

이런 정서는 그가 역사의 부침 속에서 신망과 존경을 두루 받은 배경이기도 합니다. 그의 시대는 4대 사화 등 혼란의 격변기였는데, 그 속에서 50여년간 벼슬하면서 단 한 번 1년의 귀양살이만 할 정도로 그의 삶은 안온했습니다. 인품이 뛰어난데다 성격이 너그럽고, 의리가 있으며,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두루 사귄 덕분이지요.

천하를 품을 만한 '우주의 집'

그를 두고 “하늘이 낸 완인(完人)”(이황)이라거나 “온 세상의 선비가 모두 송순의 문하로 모여들었다”(성수침)고들 했습니다. 그 덕분에 77세까지 관직에 있었지요.
그의 시조 ‘십 년을 경영하여’도 이런 성정을 잘 보여줍니다.

십 년을 경영하여 초가삼간 지어내니
나 한 칸 달 한 칸에 청풍 한 칸 맡겨 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놓고 보리라.

초가집 한 채 지어놓고 세상을 다 들여놓은 듯 행복해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지요? 내가 묵을 방 한 칸, 달이 들어올 방 한 칸, 거기에 청풍이 노닐 방 한 칸. 더 이상 들여놓을 데 없는 강산까지 병풍처럼 둘러놓고 보니 남부러울 게 없습니다.

초가삼간이 천하를 품을 만큼 커다란 집, 우주의 집이 됐으니 이 얼마나 여유로운가요. 많은 사람이 면앙정을 자주 찾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