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자리
고두현

열네 살 봄
읍내 가는 완행버스
먼저 오른 어머니가 남들 못 앉게
먼지 닦는 시늉하며 빈자리 막고 서서
더디 타는 날 향해 바삐 손짓할 때

빈자리는 남에게 양보하는 것이라고
아침저녁 학교에서 못이 박힌 나는
못 본 척, 못 들은 척
얼굴만 자꾸 화끈거렸는데

마흔 고개
붐비는 지하철
어쩌다 빈자리 날 때마다
이젠 여기 앉으세요 어머니
없는 먼지 털어가며 몇 번씩 권하지만

괜찮다 괜찮다, 아득한 땅속 길
천천히 흔들리며 손사래만 연신 치는
그 모습 눈에 밟혀 나도 엉거주춤
끝내 앉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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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의 아침 시편] 그해 봄날 완행버스에서 생긴 일
중학교에 갓 들어간 해 봄날, 남해 금산 입구 버스 정류장. 어머니와 함께 읍내 가는 완행버스를 기다리며 서 있었습니다. 햇살은 따사롭고 풍광은 평화로웠습니다. 금산 보리암에 올랐다 돌아가는 외지인들이 도란거리며 얘기꽃을 피우고 있었지요.

못 본 척, 못 들은 척…얼굴만 화끈

쪼그리고 앉아 운동화 끈을 다시 매는 사이에 버스가 금방 왔습니다. 어머니가 먼저 오르고, 제 앞으로 서너 명이 따라 올랐죠. 다급해진 저는 한쪽 신발을 미처 다 매지도 못한 채 서둘러 뒤를 따랐습니다.

한 발을 막 올리려는 순간, 앞사람 옆구리께로 어머니 뒷모습이 보였죠. 중간쯤에 난 빈자리를 몸으로 엇비슷하게 막고 서서 한 손으로 저를 바삐 부르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손으로는 멀쩡한 자리에 먼지가 묻었다는 듯 부채질을 하고 있었지요.

그 모습이 부끄러워 저는 일부러 못 본 척, 못 들은 척했습니다. 빈자리는 노약자나 임신부에게 양보해야 한다고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배웠는지라 얼굴이 화끈거리고 무안해서 어쩔 줄 몰랐지요.

그럴수록 어머니의 손짓은 더 바빠졌습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다 할 것 같은 막무가내의 모성! 그 짧고도 긴 혼란(?) 속에 어머니는 결국 그 자리를 사수했습니다.

읍내까지 가는 동안 저는 왜 그리 더디 타느냐는 어머니의 지청구를 들으며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곤혹감을 견뎌야 했지요. 초등학교 2학년 이후, 우리 식구가 금산 보리암 아래 작은 암자에서 더부살이를 시작하던 때보다 더 곤혹스러웠습니다.

‘이젠 여기 앉으세요, 어머니’

그해 여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렵게 중학을 마친 제가 대처의 고등학교로 떠나자 어머니는 이제 됐다 싶었던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셨습니다. 온 가족이 절집에서 생활한 지 9년 만에 보살에서 출가자의 품계로 ‘승진’한 셈이지요. 그로부터 스무 남짓 해가 지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버스나 지하철에 빈자리가 생길 때마다 저도 몰래 먼지 닦는 시늉을 하곤 합니다. 그때 저를 앉히려고 없는 먼지 닦아가며 손짓하던 어머니처럼 말이죠.

고단한 서울살이에 어쩌다 지하철에 빈자리가 날 때마다 저는 혼잣말로 ‘이젠 여기 앉으세요, 어머니’ 하고 권해봅니다. 그러면 “괜찮다, 난 괜찮다”를 연발하며 손사래를 치는 어머니 모습이 창문에 어른거립니다.

저 먼 땅속에서 천천히 슬로비디오처럼 재생되는 그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혀 저도 끝내 앉지 못하고 엉거주춤 흔들리며 오래 서 있곤 한답니다.


■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