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전장에 꽃핀 예술
러시아의 폭격을 받은 우크라이나의 한 지하 방공호. 공포에 사로잡힌 피란민 사이로 7세 여자아이가 걸어 나와 노래를 불렀다. 영화 ‘겨울왕국’의 주제곡 ‘렛 잇 고’ 가락에 천천히 몸을 일으킨 어른들은 이내 손수건을 꺼냈다. 이후 폴란드로 대피한 소녀는 지난 20일 국경지대에서 우크라이나 국가를 불러 세계인의 심금을 울렸다.

8일에는 대피소에서 바이올린으로 ‘작은 음악회’를 연 여성의 동영상이 공개됐다. 검은 원피스 차림의 그는 우크라이나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 ‘달 밝은 밤에’를 잔잔히 연주했다. 관객들은 ‘찬 이슬에 발이 젖을까 두려워 마세요. 집에 데려다줄 테니’라는 가사를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전쟁의 폐허 속에 울려 퍼지는 음악은 감동적이고도 처연하다. 그 속에는 상처를 어루만지는 위로와 용기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며칠 전 모래주머니로 진지를 구축한 우크라이나 오페라하우스 앞에서 병사 5명이 연 ‘벙커 공연’도 그렇다. 이에 감명받은 29개국 바이올리니스트 94명은 우크라이나 민요를 합주한 영상을 만들어 화답했다.

30년 전 유고슬라비아 내전 때는 ‘사라예보의 첼리스트’가 화제를 모았다. 그는 빵을 사려던 시민 22명이 폭격으로 목숨을 잃은 다음날 그곳에서 홀로 첼로를 켰다. 점령군 지휘관이 시민의 동요를 막기 위해 연주자를 저격하라고 명령했지만 아무도 그를 쏘지 않았다. 그의 연주는 희생자 숫자에 맞춰 22일 동안 계속됐다.

2차 세계대전 때 고립됐던 소련의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은 100만 명 이상이 굶어 죽는 참극 속에서도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일명 ‘레닌그라드’)을 들으며 871일에 걸친 히틀러의 봉쇄를 이겨냈다.

‘피아노의 거장’ 세이모어 번스타인은 6·25 때 최전방 병사들을 위해 100여 차례 ‘전장 연주회’를 열었다. 23세 생일날 참전한 그는 경기 파주·연천 등 격전지를 돌며 병사들과 피란민을 위로했다. 부상병을 위한 콘서트도 열었다.

노래와 연주의 힘은 때로 무기보다 강하다. 부드러운 화음은 폭탄 파편도 녹인다. 공교롭게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은 ‘레닌그라드’ 태생이다. 그 도시의 비극적인 역사처럼 그도 히틀러의 전철을 밟을 것인가. 무모한 전쟁광의 귀에는 눈물 젖은 ‘전장의 노래’조차 들리지 않는 걸까.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