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시낭독회’ 회장인 한경 시인은 “시에 대한 열정으로 500회까지 이어온 낭송회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며 “기네스북 등재를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범준  기자
‘공간시낭독회’ 회장인 한경 시인은 “시에 대한 열정으로 500회까지 이어온 낭송회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며 “기네스북 등재를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범준 기자
‘고모역을 지나칠 양이면/ 어머니가 기다리신다./ 대문 밖에 나오셔 기다리신다./ 이제는 아내보다도 별로 안 늙으신/ 그제 그 모습으로/ 38선 넘던 그날 바래다주시듯/ 행길까지 나오셔 기다리신다.’

구상 시인(1919~2004)의 ‘고모역’이 딸의 목소리를 타고 나직이 흘렀다. 외동딸 구자명 씨(소설가)는 “아버지가 종군기자 시절 고모역을 지나면서 북에 홀로 남은 어머니를 그리며 쓴 시”라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낭송 참여 시인 800명

구상 시인의 시 ‘고모역’을 낭송하는 딸 구자명 소설가(왼쪽)와 성찬경 시인의 ‘눈물’을 읊는 부인 이명환 수필가(가운데), 박희진 시인의 ‘지상의 소나무는’을 읽는 조환수 박희진시인기념사업회장.
구상 시인의 시 ‘고모역’을 낭송하는 딸 구자명 소설가(왼쪽)와 성찬경 시인의 ‘눈물’을 읊는 부인 이명환 수필가(가운데), 박희진 시인의 ‘지상의 소나무는’을 읽는 조환수 박희진시인기념사업회장.
지난 17일 저녁 서울 양재동 엘타워에서 열린 공간시낭독회 500번째 모임. 구씨의 낭송이 이어지는 동안 창밖에 봄비가 내렸다. 가느다란 빗소리와 함께 시의 선율이 관객들을 적셨다. 옛날 구상 시인의 마음을 적신 고모역 풍경도 그랬을까.

대구와 경북 경산 사이에 있던 고모역은 폐역이 됐다. ‘돌아볼 고(顧)’에 ‘어미 모(母)’. 이곳은 어머니를 생각하는 아들과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겹친 장소다. 인근에 있는 고개가 노래 ‘비 내리는 고모령’의 무대여서 더욱 애잔하다. 세월이 흘러 그 ‘아들’은 가고, 홀로 남은 딸이 아버지의 시를 대신 읊었다.

구상 시인이 성찬경(1930~2013)·박희진(1931~2015) 시인과 낭송 모임을 만든 것은 1979년. 그해 4월 7일 오후 2시 첫 낭독회를 서울 종로구 원서동 ‘공간사랑’에서 열었다. 구상 시인과 친분이 있던 건축가 김수근 씨가 건축사무소 ‘공간’ 지하 소극장을 내줘 낭독회 이름도 그렇게 지었다.

매월 열린 낭독회에서 이들 시인은 자작시를 낭송했다. 함께한 청중이 150명을 넘을 만큼 인기였다.

시어머니 생신 준비 중 달려가

‘공간시낭독회’ 창립 회원인 작고 시인 구상(왼쪽), 성찬경(가운데), 박희진 시인.
‘공간시낭독회’ 창립 회원인 작고 시인 구상(왼쪽), 성찬경(가운데), 박희진 시인.
이 모임은 1988년 10월 100회, 1997년 2월 200회, 2005년 8월 300회, 2013년 11월 400회를 거쳐 500회를 맞았다. 그동안 시를 낭독한 인원은 약 800명. 모임 장소는 바탕골예술관, 북촌창우극장, 한국현대문학관 등으로 11차례 옮겼다. 현재는 종로구 노스테라스빌딩에서 매월 첫째 주 목요일 오후 6시에 40명 안팎의 회원이 모여 자작시를 낭송하고 있다.

이날 성찬경 시인의 부인 이명환 씨(수필가)는 남편의 시 ‘눈물’을 낭송하며 지난 시절을 회고했다. 이씨는 “‘눈물이 마음 안에 고운 노을로 퍼진다’는 마지막 문장은 수천 번도 더 되뇐 구절”이라며 “공간시낭독회 첫날 시어머니 생신 준비도 다 못한 채 가서 보았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박희진 시인의 시 ‘지상의 소나무는’을 낭송한 박희진시인기념사업회의 조환수 회장은 “첫날 현장에 저도 있었는데 그땐 20대였다”며 세 시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창립 시인들의 시를 감상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깊고 고요했다. 원로 시인들의 회고는 더 큰 울림을 줬다. 김동호 시인(88)은 “시가 발달한 나라는 썩지 않는다”며 “시가 곧 방부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파키스탄 대사를 지낸 고창수 시인(88)은 “창립 멤버들이 살아 있을 때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게 안타깝다”며 “공간시낭독회가 한국을 넘어 세계로 뻗어나가길 바란다”고 했다.

“우린 모두 시의 오케스트라 단원”

지난 17일 서울 양재동 엘타워에서 열린 500회 기념 행사에는 시인 80여 명이 모였다.
지난 17일 서울 양재동 엘타워에서 열린 500회 기념 행사에는 시인 80여 명이 모였다.
이날 행사를 축하하기 위해 일부러 걸음한 시인도 많았다. 구상선생기념사업회장인 유자효 시인은 “돌아가신 분들의 흰 수염이 오늘따라 더 생생히 떠오르는데, 오늘 우리 이곳에서 시를 낭송하며 코로나와 전쟁의 비극을 극복하자”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한국가톨릭문인회 이사장인 허형만 시인은 “등단 50년간 가장 기억에 남는 낭독회”라며 천주교인이었던 구상 시인의 삶과 시를 되새겼다.

그사이에 시인 김청광, 윤준경 씨가 가곡 ‘그리운 금강산’과 ‘진달래꽃’으로 분위기를 돋웠다. 한무경 씨(성악), 최현숙 씨(플루트) 의 공연도 이어졌다.

이날 진행을 맡은 이인평 시인은 “구상 시인에게 ‘꾸밈말을 쓰지 마라’는 가르침을 받았고, 성찬경 시인에게 ‘시의 밀도와 언어의 선명성’을 배웠으며, 박희진 시인에겐 ‘한 편의 시를 쓰는 데에는 천지 만물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들었다”며 고인들을 기렸다.

이 모든 프로그램을 오랫동안 준비한 공간시낭독회장 한경 시인은 “그동안 여러 장소를 옮겨 다니면서도 시의 끈을 놓지 않은 우리는 모두 시의 오케스트라 단원”이라며 “앞으로 600회, 1000회를 넘어 이 화음이 이어지길 빈다”고 말했다.

500번째 공간시낭독회, 봄밤을 함뿍 적시다 [고두현의 문화살롱]
이날 특별 초대손님으로 참가한 박종원 사진작가(늘봄농원 대표)는 “시가 이렇게 마음을 푸르게 살려주는 현장에 와 있으니 행복하다”면서 “늘 푸른 상록수의 생명력처럼 시낭송의 선율이 온 세상에 가득 퍼지면 좋겠다”고 했다. 공간시낭독회 501회 모임은 다음달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