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3월 첫주만큼은…
의외로 주변을 돌아보면 거기가 그런 곳이었는지를 의아하게 생각하며, 반문하게 되는 장소가 있다. 오늘은 서울 용산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용산과 관련있는 나라는 어디일까라고 질문하면 대개는 미국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용산 미군기지의 설움은 일제강점기에서 시작됐다.

조선 말은 혼란의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백성은 분열했다. 갈등은 극에 달했고, 나라에 해답을 제시할 황실은 둘로 나뉘어져 반목했다. 대원군과 명성왕후의 갈등은 외세를 끌어들이는 명분을 제공하게 된다. 러시아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고, 그와 함께 일본군이 당당하게 우리 땅에 발을 디디게 된다. 당시 일본군이 점령하고 호시탐탐 우리 땅을 삼키고 싶은 야욕을 드러낸 곳이 용산이다. 1904년 슬픈 역사다. 6년 후 1910년 한일병합에 의해 조선은 식민지로 쇠락했다. 일본에게 숨통을 터준 용산은 해방 후 미군이 자리잡게 되고, 일반인들에게 용산미군기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용산은 우리가 힘을 잃었던 쇠락의 과거를 품고 있다.

100여 년이 지난 1997년 우리는 또 위험한 시기를 맞았다. 나라의 곳간은 비어갔고, 하루치 외채 이자도 지급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구제 금융을 요청했다. 모라토리엄은 간신히 넘어설 수 있었다.

국가부도를 막은 중심에는 국민이 있었다. 온 국민이 외채를 갚으라고 꽁꽁 감춰뒀던 금을 들고 나왔다. 3년 만에 외환위기 사태를 조기 졸업하고 지금의 디지털전환시대를 만들 씨앗, 정보기술(IT) 혁명에 나설 수 있게 됐다. 1904년과 1997년 간극이 채 100년도 안 되는데, 어떻게 같은 땅에서 이리도 다른 일이 벌어졌을까.

한국 현대사는 질곡의 역사다. 용서와 화해, 국민통합이라는 의제는 누구에게나 반드시 이뤄야 할 당면 과제다. 분열과 갈등으로는 미래를 만들 수 없다는 신념이 필요하다. 외환위기 당시 국민이 눈물겨운 금 모으기 운동으로 화답해준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되새겨본다.

코로나19는 평등하게 덮쳐오지 않고 서민과 자영업자, 심지어 종교인 등에게 큰 타격을 줬다. 우리 사회 양극화는 더 심해졌다. 올해 출산지수는 0.7에 이를 것이라 한다. 노인빈곤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수준이다. 이 모든 질곡을 넘기 위해서는 실천과 행동이 필요하다. 외환위기 때 금을 모아 나라를 살려보자는, 경제식민지는 절대 될 수 없다는 국민의 적극적인 행동이 빛을 발했다.

용산을 지난다. 과거는 잊은 채 공원을 품은 새로운 도시를 꿈꾸고 있다. 그래도 기억할 것은 기억해야 한다. 용산에 왜 일본군이 들어와서 우리가 고난을 겪었는지 기억해야만 한다. 기억을 어떻게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지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해야 산자의 몫을 조금은 하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이번주는 그렇다. 삼일절이 있는, 언 땅에서 생명이 움트는 한 주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