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심을 내려놓다(息機)

이미 지나간 아주 작은 일들도
꿈속에선 선명하게 생각이 나네.
건망증 고쳐 준 사람 창 들고 쫓아냈다는
그 말도 참으로 일리가 있네.
아내를 놔두고 이사했다는 것 또한
우연히 한 말은 아닐 것이라 싶네.
몇 년간 병든 채로 지내온 지금
기심(機心)을 내려놓는 것이 약보다 낫네.


이색(李穡, 1328~1396) : 고려 시인, 대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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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의 아침 시편] 그가 집착에서 벗어난 비결은?
오늘은 고려 말기 시인이자 대학자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시를 읽습니다. 그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함께 고려삼은(高麗三隱)으로 추앙받은 인물이지요. 14세 때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한 수재였습니다. 원나라에서도 과거에 급제해 양국 관리를 겸할 만큼 재주가 뛰어났다고 합니다.

건망증 고쳐 준 사람을 쫓아내다니

그런 그도 여말선초 격변의 역사 속에서 몇 차례나 유배와 추방을 당했습니다. 첫째와 둘째 아들이 살해되는 고통까지 겪었지요. 역성혁명에 협력하지 않아 한때 제자였던 정도전과 조준 등의 칼날 앞에 서야 했습니다.

새 정권의 권유를 뿌리치고 낙향했지만, 아들들의 죽음 때문에 결국에는 깊은 병을 얻었죠. 시골집에 은거한 지 2년 만에 부인이 죽고, 그로부터 2년 뒤엔 그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남긴 시가 많지만, 그중에서도 ‘기심을 내려놓다(息機)’의 행간은 더없이 쓸쓸하고 애잔합니다. 마지막 구절 ‘기심(機心)을 내려놓는 것이 약보다 낫네’에 주제가 함축돼 있지요.

기심이란 무엇일까요? 기회를 보아 움직이는 마음, 책략을 꾸미는 마음을 말합니다. 옳으니 그르니, 좋으니 싫으니 따지는 마음을 내려놓고 정신을 쉬게 해야 비로소 온전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얘기지요.

이 시에 건망증 얘기가 두 번이나 등장하는데, 건망증 고쳐준 사람을 창으로 쫓아냈다는 이야기는 『열자(列子)』 주목왕(周穆王) 편에 나옵니다.

송나라 화자(華子)는 건망증이 아주 심했지요. 어느 날 노나라 선비가 비방을 써서 병을 고쳐줬습니다. 기억력을 되찾은 그는 오히려 화를 내면서 처를 내쫓고 창으로 그 선비까지 쫓아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인즉슨, 모르고 사는 게 약이었는데 나를 왜 번뇌의 바다에 다시 빠뜨렸느냐는 것입니다.

“더 큰 비극은 자신을 망각한다는 것”

아내를 두고 이사했다는 이야기는 『공자가어(孔子家語)』 현군(賢君) 편에 있습니다. 노나라 애공(哀公)이 공자에게 건망증이 심하면 이사하면서 처를 놔두고 온다는데 사실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그건 심하다고도 할 수 없다. 정말 심한 경우는 걸왕(桀王)처럼 자기 자신을 망각하는 것이다”고 답했습니다. 자신을 망각하는 것에 비하면 그 정도는 건망증 축에도 못 낀다는 말로 도리를 잊고 처신을 잘못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지요.

이색도 얼마나 심란했으면 그랬을까요. 건망증 고쳐준 사람에게 창을 휘두른 일이나 마누라 두고 이사한 것처럼 자신도 얽히고설킨 세상사 다 잊고 싶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하긴 생각이 많은 게 병을 부르니 그 생각 자체를 쉬는 게 어떤 약보다 낫겠지요.

이색은 또 다른 시 ‘차 달이는 일(煎茶卽事)’에서도 ‘하얀 귀밑머리에 누가 기심을 잊은 자인가/ 흉중의 수많은 글 깨끗이 씻은 이로구나(髮絲誰是忘機者 淨洗胸中書五車)’라고 노래했습니다.

그의 말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뒤척이는 마음속의 집착과 세파의 근심을 맑게 씻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약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 또 다른 문제이긴 하겠지만요.

■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