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엽의 논점과 관점] '대동세상'이라는 이재명의 꿈
‘바지’와 ‘쥴리’에 정신 팔린 사이 ‘대동(大同)세상’이 진군 중이다. 이재명 경기지사가 출사표로 던진 미래 한국의 좌표다. 그는 “억강부약으로 대동세상을 향하겠다”고 선언했다. 서울대 청소원 사태에서도 “누구도 서럽지 않은 대동세상”을 약속했다. 대동세상연구회라는 거대 풀뿌리 조직도 전국에서 우후죽순이다.

대동세상은 유교문화권의 이상향이다. 예기에선 대동을 ‘경쟁과 쟁탈이 발생하지 않으며, 이익도 공평하게 나누는 공(公)의 상태’라고 했다. 이 지사는 “모두가 자기 몫을 누리는 공정한 세상”으로 정의한다. 개념적으로 그럴싸하다. 하지만 역사와 현실에서의 수용을 보면 무수한 갈등을 예고한다. 민족·민중사관에 경도된 586이 30여 년 전 외친 구호가 바로 대동세상이었다. 그 갈망은 북한과 사회주의에 대한 빗나간 동경으로 이어져 NL·PD라는 반문명적 일탈을 불렀다. 이른바 진보진영에선 지금도 대동세상을 ‘해방구’와 연계해 이해한다. 대동세상이란 슬로건에서 묘한 도발감이 전해지는 이유다.

30년 전 뼈아픈 실패의 기억

시진핑의 ‘공동부유(共同富裕) 사회’와의 높은 싱크로율도 꺼림직하다. 이 지사가 대동세상론으로 등판한 지난 1일 시진핑도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식에서 ‘공동부유 사회로의 이행’을 선언했다. 공동부유는 마오쩌둥 이래 중국 사회주의의 최종 지향이다. ‘함께 잘살자’는 목표는 대동세상과 대동소이하다.

문제는 ‘어떻게’일 것이다. 중국은 지난달 저장성을 ‘공동부유 시범구’로 지정하고 부유층과 기업에 “사회에 보답하는 체제 완비”를 주문했다. 공동부유의 방법으로는 공익사업과 사회환원을 제시했다. 알리바바 디디추싱 등 대표 기업들에 대한 중국 당국의 잇단 과잉 개입에는 이런 자락이 깔려 있다.

이 지사의 방법론은 불투명하다. 공들여온 기본소득조차 말이 자꾸 바뀐다. 문재인 정부가 내건 ‘다 함께 잘사는 세상’과의 구별도 힘들다. 특권, 반칙, 약자, 헌법1조, 공정, 뉴딜 등 출사표의 언어는 문 대통령의 허망했던 연설들과 판박이다. 다만 ‘억강부약’을 노골적으로 강조한 게 문재인 정부와 다를 뿐이다. ‘폭력의 독점체’인 국가가 대놓고 억강부약한다면 대기업과 부자의 악마화는 자동 수순이다.

모험주의적 이상론은 안 돼

불평등 해소를 위해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게 이 지사 논변이지만 근거박약이다. 양극화는 ‘부자 때리기’로 일관한 문 정부에서 최악이다. 덤으로 국고가 거덜났다. 그가 계승한다는 노무현 정부 정책도 서울 강남 부자들의 환호만 키웠다. 이런 사실관계에 대한 반박 없는 대동세상론이라면 이상론을 자가발전시킨 모험주의일 뿐이다.

‘미군은 점령군’이라는 단선적 역사관을 노출한 뒤끝이라 걱정이 커진다. 이 지사는 자신의 집권은 ‘정권 교체’가 아닌 ‘세상 교체’라 역설한다. 대동세상론에선 그런 열정이 고스란히 감지된다. 하지만 박물관에서 되살린 이분법으로 미래를 열겠다는 건 분명 과욕이다. ‘지적 콤플렉스’ 논란을 넘어 지적 정체나 퇴행을 의심받기 십상이다.

한국은 유엔무역개발회의 사상 최초로 ‘선진국’으로 격상됐다. 개발도상국 혜택을 포기하고 우리 정부가 신청한 결과라 호들갑 떨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유례없는 성취의 공을 굳이 따지자면 국부(國父) 이승만을 빼놓을 수 없다. 사회주의적 이상론이 세계를 휩쓸던 혼돈의 시기에 ‘자유인들의 공화국’을 세워낸 그의 통찰은 한반도 역사의 물줄기를 진정한 ‘진보’로 돌려놨다. 개인·자유·개방을 향한 문명사적 흐름은 해방공간보다 훨씬 분명해졌다. 지금은 역류의 시간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