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의 문화살롱] "그래, 그래…올 추석 달은 눈시울이 붉겠구나"
추석 밤은 만월(滿月)이지만, 어머니는 반월(半月) 때부터 기다리셨지요. 오곡이 무르익는 계절의 큰(한) 가운데(가위)에 있는 명절. 그러나 올 한가위는 이지러진 달처럼 한쪽이 텅 빈 ‘반가위’입니다. 모두가 감염병에 마음 졸이고, 생활고에 가슴 저리니 하룬들 편하겠는지요.

직장인 열에 일곱이 고향에 가지 못합니다. 저도 가 뵙지 못하고 편지를 씁니다. 옛날 서포 김만중이 유배 중 어머니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구운몽》을 썼듯이, 시인·작가들의 달빛에 관한 명문과 그 행간에 스민 사연을 들려드리며 홀로 계시는 쓸쓸함을 덜어드릴까 합니다.

‘비대면 명절’의 달빛은 처연하고, 그 아래 수많은 이야기가 아프게 지나갑니다. 문학평론가 이어령 선생은 “달은 하나이지만 달빛은 천 군데에 비친다”고 했지요. 그의 어린 시절, 할머니 일화가 생각납니다. 달빛 아래 가난한 이웃이 쌀 훔치러 온 것을 발견하고는 머슴들을 깨워 “내가 오늘 쌀 몇 가마 가져가라고 했는데 얼마나 바빴는지 이 밤에 왔구먼. 혼자 다 못 가져갈 테니 자네들이 한 가마씩 져다 주게”라고 했다는 얘기 말입니다.
[고두현의 문화살롱] "그래, 그래…올 추석 달은 눈시울이 붉겠구나"
배고픈 사람들을 향한 시인의 마음 또한 애틋하기 그지없습니다. 이상국 시인은 추석 전날 밤 앞집을 털려다가 차 지붕으로 뛰어내린 도둑 이야기를 시로 썼지요. ‘여북 딱했으면 그랬을라고…’ 그는 ‘밤이슬 내린 차 지붕에 화석처럼 찍혀 있는 도둑의 족적을 바라보던 나는 그때 허름한 추리닝 바람에 낭떠러지 같은 세상에서 뛰어내린 한 사내가 열나흘 달빛 아래 골목길을 죽을 둥 살 둥 달려가는 걸 언뜻 본 것 같았다’(‘달려라 도둑’)며 먼 산 보듯 딴청을 피웠습니다.

우리는 달의 한쪽 면만 보고 살지요. 자전과 공전 주기가 같기 때문에 뒷면을 보기 어렵습니다. 우리 삶의 앞뒷면도 이와 같아서 가려진 쪽에 많은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남모르는 상처와 옹이, 말 못할 고통과 슬픔이 거기 있지요. 우리가 잘 모르는 이 뒷면이 정작 중요한 쪽입니다.

어떤 사람은 추석날 ‘시래기국에서/ 달을 건져내며’(정희성 ‘추석달’) 혼자 웁니다. 아파트 창 너머 처량한 달을 보며 ‘잃을 것 다 잃고/벗을 것 다 벗고/알몸으로’(조병화 ‘아파트의 추석달’) 돌아섭니다. 또 어떤 이는 가을 대추 속에 켜켜이 쌓인 ‘태풍’과 ‘천둥’, ‘땡볕’과 ‘초승달’(장석주 ‘대추 한 알’)의 시간을 되새깁니다.

그래도 세상은 살아볼 만한 것이라고, 힘을 내보자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건 슬픔의 옹이를 쓰다듬는 어머니의 손길 덕분입니다. 그 따스한 마음이 곧 하나의 몸으로 천 군데를 비추는 달빛이지요.

서정주 시인은 추석 전날 어머니가 “저 달빛엔 꽃가지도 휘이겠구나!”라며 흐뭇해할 때 ‘대수풀에 올빼미도 덩달아 웃고/달님도 소리내어 깔깔거렸네’(‘추석 전날 달밤에 송편 빚을 때’)라고 노래했습니다. 어머니 한 말씀에 온몸이 환해지는 가족 풍경이 그림 같습니다.

문정희 시인은 ‘지난여름 모진 홍수와/지난봄의 온갖 가시덤불 속에서도/솔 향내 푸르게 배인 송편으로’ 떠오른 달의 뒷면에서 ‘사발마다 가득히 채운 향기/손바닥이 닳도록/빌고 또 빌던 말씀’(‘추석 달을 보며’)을 발견합니다.

저도 어느 해 어머니가 큰집에서 얻었다며 ‘속엣것보다 포장 더 무겁게 담아 보낸’ 유자 아홉 개와 ‘어렵더라도 참고 반다시 몸만 성키 추스리라’는 편지에 콧날이 시큰거려 밤새 문 닫지 못하던 날이 기억납니다. 곧 다가올 추석날 밤에는 고향집 마당 가장자리로 ‘가지런한 기러기 떼 그림자가 달빛을 한 옴큼씩 훔치며’(이문구 연작소설집 《관촌수필》 중 ‘공산토월’) 날아가겠지요.

벌써 음력 초사흘, 미황색 초승달이 나무에 걸렸습니다. 젊은 시절 어머니 눈썹을 빼닮은 달. 며칠 후 어머니는 빈 마루를 혼자 서성이며 달빛에 또 소원을 빌겠지요. 이 어려운 시절에 배곯거나 외롭거나 쓸쓸한 사람들에게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을 내려달라고. “그래, 그래… 올 추석 달은 눈시울이 붉겠구나”라며 멀리 있는 우리 등을 연신 다독거리기도 하면서….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