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승윤 칼럼] 지소미아 사태로 드러난 한국 외교의 민낯
일본의 수출제한 조치에 대한 맞대응으로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를 선언했던 문재인 정부가 막판에 ‘조건부 연장’으로 돌아섰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지소미아 종료를 철회하라는 압력을 전방위로 받았다. 이웃 일본으로부터는 노골적인 무시를 당했다.

애초부터 잘못된 출발이었다. 한·일 지소미아는 일본이 요청한 게 아니었다. 미국발(發)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중국의 노골적인 패권 도전에 직면한 미국이 요청한 것이었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6년 말 발효됐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 8월 고위 당·정·청 회의에서 “지소미아는 2년 남짓 했던 것”이라며 “그 이전에도 한·미 동맹이나 안보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말했다. 청와대 안보라인도 비슷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미국의 생각은 그 기간 동안 바뀌었다. 도널드 트럼프 집권 이후 미국이 주도했던 동아시아 안보 질서를 ‘한·미·일 협력체제’ 중심으로 재편하는 중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지소미아 연장 바로 다음날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노골적인 무례다. 이에 앞서 문 대통령이 ‘국민과의 대화’에서 “한국은 일본 안보에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다”며 수출제한 조치 해제를 요구했을 때도 일본은 일절 반응하지 않았다.

한국은 왜 미국으로부터 엄청난 압박을 받고, 일본으로부터는 무시를 당했을까. 뻔히 읽히는 수(手)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문재인 정부 들어 지난 2년 반 동안 나라마다 미리 정해진 듯한 대응을 보여왔다. 북한에 대해서는 감싸안기, 중국엔 자극 안 하기, 미국에는 눈치보기, 일본에는 강경 대응하기였다.

원죄는 북한에 대한 집착이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지고지순한 명제로 둠으로써 나머지는 이것에 끼워맞춰지는 것들이 돼버렸다. 북한과는 평화적인 협력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대의명분에 빠져 북한이 어떤 행동을 해도 감싸고 있다. 해안포 사격을 해도 조용하다. 남북 합의를 위반했는데도 항의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

중국은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존재다. 자극해선 안 된다는 명제가 도출됐다. 중국 정부가 2017년 ‘사드 보복’에 나서면서 3불정책(사드 추가배치, 미국 미사일방어체계 참여, 한·미·일 군사동맹 참여 불가)을 받아들일 것을 압박하자 이를 수용했다. 주권침해 논란까지 감수한 결정이었다.

미국은 동맹국인 동시에 북한과의 평화 프로세스를 망칠 수도 있는 초강대국이다. 문재인 정부는 미국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늘 눈치를 본다. 하지만 북한과의 관계를 중시하다 보니 때로는 상황을 오판하거나 외교적인 수사를 잘못 해석하는 일이 생기고 있다. 그래서인지 미국은 요즘 한국에 대해 직설적인 발언을 많이 하고 있다.

북한의 핵무기 위협을 늘 거론하는 일본은 언제나 훼방꾼이다. 일본 얘기만 나오면 초강경 대응이다. 지소미아 연장을 놓고 일본 내에서 “거의 완벽한 승리”라는 평가가 나오자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나를 시험해 봐라(try me)”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토착왜구, 이순신 배 열두 척, 죽창가 발언 등도 다 같은 맥락이다.

한국은 이제 국제사회에서 존재감을 잃어가고 있다. 답안지를 미리 써놓은 국가를 만나고 싶어 하는 국가는 없다. 중국은 한국의 정상회담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북한도 문 대통령의 초청을 거부했다. 일본과는 다음달 말 정상회담 약속을 잡았지만 성과를 낼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19세기 영국 총리를 지낸 헨리 존 템플(파머스턴 경)은 “국가 간에 영원한 친구나 동맹은 없다. 국익만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북한은 형제이면서 적이다. 일본은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이웃이면서 한국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다. 중국은 이념적으로 적대 국가이면서 최대 교역국이다. 집권 후반기로 접어든 문재인 정부가 국제사회의 이런 양면성을 받아들이지 않고 단선적인 외교를 계속한다면 ‘지소미아 파동’ 같은 사태가 반복될 것이다.

hyuns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