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쩐'(錢)은 피곤하다
가상화폐에 대한 설명과 견제 논리로 ‘화폐의 타락’이 있다. 돈이 돈 구실을 못해 나타난 것이라니, ‘화폐가치의 추락’이라는 의미다. 비슷한 얘기는 부동산시장에도 있다. “집값이 오른 게 아니라 돈 가치가 떨어진 것”이라는 진단이다. 화폐 자체를 사고 팔리는 특수한 재화라고 본다면 일리 있다. 실제로 유통 화폐가 늘어났고 돈값(금리)도 싸졌다. “집값이 내린 지역은 어떻게 된 것인가”라는 반론도 나올 수 있겠다. 이것도 수급에 따라 값이 오르내리는 돈의 속성에 주목하면 충분히 설명된다. 돈이 많고 몰리는 지역과 그렇지 못한 곳이 있는 것이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내리면서 돈값은 더 떨어지게 됐다. 부실 기업과 빚 많은 가계는 한숨 돌릴지 모르지만, 화폐의 타락이 걱정된다. 가뜩이나 추락한 원화의 대외 가치는 전망이 더 어두워졌다. ‘국가시스템 중 가장 신뢰할 만한 게 화폐’라는데, 그 중요한 신뢰체계가 또 흔들린다. 그런 위험한 처방도 불사해야 할 정도로 경제가 어렵다는 얘기도 된다.

‘쩐(錢)의 이동이 시작됐다’는 보도도 벌써 나온다. 1000조원에 달하는 부동자금이 발 빠르게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동축은 두 개, 안전성과 수익성이다. 금과 미국 달러 수요가 늘어난다는 것은 전자를 의식한 것일 테고, 해외 증권 투자 증가는 후자를 노린다고 볼 상황이다.

어디서든 클릭 몇 번으로 뉴욕증시 주식을 사는 시대다. ‘자본유출’이라는 거창한 말은 금융당국이나 고민할 일일 뿐, 개인들 돈에 애국심을 호소할 수도 없다. 국내 증권사가 판매하는 펀드 중에는 세계 66개국의 달러표시 국공채에 분산 투자하는 상품도 있다. 안방에서 터키 아르헨티나 채권을 달러로 헤징해 사들이는 판이니 원화가 돈값이 싼 한국 안에 머무르길 거부하는 꼴이다.

국경 없이 왕성하게 움직이기는 하지만 한국에서 투자처를 찾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원화도 피곤해졌다. 물론 국내경제가 살아나고 기대수익이 올라가면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쩐의 유출, 쩐의 탈한국 국면이다. 인재도, 기업과 기술도, 돈까지 나가면 경제는 악순환의 덫에 빠질 것이다. 무역전쟁·기술전쟁을 넘어 최후의 경제전쟁처럼 화폐전쟁이라도 일어나면 한국돈은 어떻게 될까. 이미 원화는 약해졌고 피곤해한다.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