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칼럼] 한국 산업이 사는 길
어느 국책연구원장은 한탄을 했다. “일본이 저렇게 나올 줄 알았지만 미리 경고하거나 대응 연구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현실과 상관없이 ‘정치 코드 맞추기’ 연구로 내몰리는 게 지금의 국책연구소다.

딱 100년 전이다. 막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정치’(1919년) 강연을 통해 정치 영역에서 치명적인 죄악으로 ‘객관성 결여’와 ‘무책임성’을 지목했다.

그가 정치인의 자질로 ‘열정’에 더해 ‘책임감’과 ‘균형감각’을 제시하고, ‘신념윤리’뿐 아니라 정치적 결정의 결과에 책임을 지는 ‘책임윤리’를 강조한 이유다. 결과를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무책임한 정책이 난무하는 한국 정치를 두고 한 말처럼 들린다.

복잡계 경영학자들은 기업이 생존을 위해 경계해야 할 경영 리스크로 세 가지를 꼽는다. 선제 대응 실패에 따른 ‘단절 리스크’,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도태 리스크’, 신뢰와 상호주의 상실로 인한 ‘왕따 리스크’가 그것이다. 국가 경영이라고 다를 게 없다.

일본의 수출규제가 시작되자 “기업들은 그런 낌새를 알아채지 못했느냐”는 산업 주무부처 관료, “예상했던 대로 아픈 곳을 찔렀다”는 청와대 참모, “사태가 장기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대통령 등 사전 대응 실패에 반성하는 사람이 없다.

‘외부 위협’을 재빨리 알아채는 국가가 ‘내부 갈등’을 이겨내면서 높은 혁신율을 보인다는 게 정치학자들의 ‘창조적 불안정(creative insecurity)론’이다. 내부 갈등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외부 위협이 수면 위로 올라왔는데도 사태를 분간하지 못하는 국가에서는 혁신이 제대로 일어나기 어렵다는 얘기다. 위협을 뚫고 나아가야 할 건 개인과 기업들인데 이들의 발목을 잡는 자해적인 정책들을 고집하는 국가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은 산업에도 들어맞는다. 우리 혼자 산업을 키울 수 있다는 건 착각이다.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기른다’는 중국의 개혁개방 시대 ‘도광양회(韜光養晦)’ 같은 전략은 기본이다.

여기에 외부 견제나 공격을 부르지 않고 협력을 이끌어내는 ‘국제적·외교적 겸손함’이 함께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지금의 주력산업이 어떻게 성장해온 것인지 잊고 있다.

실력을 기르기도 전에 상대를 자극하는 제스처를 보이거나 목표를 남발하는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다. 청와대가 직접 나서 비메모리 반도체, 수소전기차, 바이오 헬스를 3대 중점 산업으로 키우겠다고 떠드는 게 플러스가 될지, 마이너스가 될지 생각이나 해봤는지 모르겠다. 치밀한 전략도 없이 ‘제조 4강’부터 떠벌린 ‘제조업 르네상스’도 그렇다. 미·중 충돌 속에 협력을 구해도 부족할 독일과 일본을 건드려 무슨 실익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한국 산업은 ‘글로벌 분업’으로 발전해왔다. 미·중 충돌을 우려하는 이유도 이 때문인데 한·일 갈등까지 야기하면 어쩌자는 것인가? 소재·부품·장비 국산화를 말하지만, 지금의 글로벌 분업구조는 그게 가장 효율적이고 글로벌 경쟁력에 유리하기 때문에 형성된 측면도 있다. 경쟁력 아닌 국산화 잣대만을 고집하다, 그것도 100% 국산화를 외치다 고립을 자초해 산업을 망치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

한국·일본·중국이 위치한 동북아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경쟁이 치열한 지역이다. 지정학적 위험성이 원망스러울 때도 있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진화에 가장 유리한 환경이기도 하다. 늘 깨어있고 전략만 제대로 세운다면 말이다. ‘민족주의 대 민족주의’ ‘국가주의 대 국가주의’ ‘정부 대 정부’로 맞붙으면 우리가 이길 수 있는가? 오히려 개방과 협력을 추구하면서 개인과 기업이 더욱 분발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산업을 키우기는 어려워도 망치는 것은 한순간이다.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