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칼럼] 미덥잖은 靑의 전략적 모호성
미국에 안보를 의존하고, 중국에 수출을 많이 하는 우리나라 입장에서 미·중 충돌은 그 자체로 악몽이다. 차라리 현 상황이 미·중 간 ‘최후의 대결’이고, 그래서 한쪽을 택해야 한다면 고민할 것도 없다. 시장이 생존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상황이 언제 돌변해 미·중이 타협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미·중 충돌이 시작된 이상 옛날로 돌아갈 일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미·중이 타협안을 내놔도 또 다른 대립의 예고탄일 가능성이 높다. 대립과 타협을 반복하는 미·중 간 긴장관계가 길게 이어진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기업이 자율적으로 결정해야 할 부분이 있다.” 윤종원 청와대 경제수석이 미국이 중국 화웨이와의 거래 중단을 압박하는 것과 관련해 밝힌 입장이다. 이를 두고 정부가 섣불리 한쪽 편을 들 수 없는, ‘전략적 모호성’을 취한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중요한 건 미국과 중국이 우리의 전략적 모호성을 수용해 줄 것이냐는 점이다. 한국은 소규모 개방경제 국가다. 강자가 전략적 모호성으로 나오면 약자는 안달이 나지만, 약자가 전략적 모호성을 택할 때 강자는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다. 미·중이 우리 정부 말을 액면 그대로 믿어줄지도 의문이다. 한국에서는 정부가 경영권 승계나 보호 등 기업지배구조에 일일이 간섭하고, 내부거래까지 다 규제한다는 것을 모를 리 없다. 정부가 자율을 존중하는 기업정책을 펴왔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기업 자율 운운하면 누가 수긍하겠나.

당장은 기업 자율 카드가 통하더라도 전략적 모호성이 얼마나 갈지는 또 다른 문제다. 우리가 보유한 ‘전략적 자산’에 따라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우리 반도체 기업 관계자들을 불러들인 것과 관련해 여러 해석이 나오지만, 중국이 면담하려는 한국의 글로벌 기업 수가 지금보다 10배, 100배 많았다면 ‘경고성 협박설’은 ‘협조성 요청설’로 바뀌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기업 자율로 전략적 모호성을 지탱하겠다면 중국이 대체할 수 없는, 미국이 대체할 수 없는 기술이나 제품 수, 그리고 이를 생산하는 글로벌 기업 수가 곧 우리의 전략적 자산이다. 미·중 충돌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라면, 그동안 ‘경제력 집중’이란 엉뚱한 잣대로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기업을 더 많이 만들지 못한 것을 땅을 치고 후회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과학기술정책, 산업정책 실패도 그렇다. 미·중 충돌로 중국의 기술발전 속도가 느려지면 이 기회를 어떻게 살릴지 얘기가 들릴 만도 한데, 그럴 기미조차 안 보인다.

기업이 자율로 결정해야 할 문제에 미·중이 보복할 가능성을 미연에 막아낼 통상·외교역량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전 세계에서 중국을 가장 잘 안다는 두 나라는 미국과 일본이다. 미·중 협상의 8대 핵심쟁점(환율, 미국 상품 구매, 비관세 장벽, 강제 기술이전, 지식재산권 절도, 산업스파이, 국유기업 보조금, 협상이행 감독 등)에 비하면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은 껍데기나 다름없다. 미·중 타협으로 중국이 미국 상품 수입을 늘리는 ‘관리무역’으로 가면 동북아 산업판도의 변화가 불가피할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정부와 기업 간 깊은 대화와 정보 교환, 공동 대응이 절실하지만 현실은 거꾸로다.

약자일수록 전략적 모호성은 더욱 치밀한 전략을 요구한다. 우리나라가 양보할 수 없는 가치는 무엇이고,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기업 자율에 바탕한 전략적 모호성은 우리 기업이 부당한 공격을 받을 때 기업 편에 서서 지켜줄 수 있는 유능한 정부라야 먹힐 수 있다. 청와대의 ‘전략적 모호성’이 ‘전략 부재’의 다른 말이라면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는 상상을 초월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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