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칼럼] 기업 주도 '빅 푸시'를 보고 싶다
정부 연구개발(R&D) 예산이 20조원을 넘었지만 국가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5% 정도다. 국가 R&D 투자의 75%는 기업에서 나온다. 앞으로 정부 R&D 예산은 과거처럼 증가하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고 보면 기업의 역할은 더욱 커질 것이다.

이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이 일어났다. 비메모리 반도체를 육성하기 위해 삼성전자는 2030년까지 133조원의 R&D 및 시설투자로 산업 생태계까지 만들겠다고 나섰고, 정부는 1조원의 R&D 예산을 투입하겠다고 발표했다. 133 대(對) 1. 이종호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장은 “정부 1조원은 비메모리 인력 양성으로 돌리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우리나라는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 정부가 연관산업의 동시 발전을 꾀하는 대규모 투입, 이른바 ‘빅 푸시(big push)’로 산업을 일으키는 데 성공한 사례로 꼽힌다. 그러나 이후 정권이 새로 들어설 때마다 과거의 성공에 사로잡혀 정부 주도로 신성장동력을 찾겠다고 헤매는 사이 신산업에서 경쟁국들과의 격차는 더 벌어진 형국이다.

빨리 추격해야 할 상황이라면 ‘빅 푸시’는 여전히 시도해볼 만한 전략이다. 하지만 지난 시절처럼 정부가 그림을 그리고 산업을 한꺼번에 일으키는 식의 ‘정부 주도 빅 푸시’는 유물이 된 지 오래다. 시장이 커지고 복잡해진 데다 기업의 지식이 정부의 지식을 훨씬 능가하는 환경에서는 그 방식이 통할 리도 없다.

한국 경제의 추락을 막기 위해 투자부터 살리자는 데 동의한다면, 정권에 상관없이 굴러갈 모델을 고민한다면, 대안은 ‘기업 주도 빅 푸시’일 것이다. 삼성전자가 대규모 비메모리 투자를 감행하듯이 기업들이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산업 창출에 나서는 방식이다. 분야에 따라 대기업과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이 경쟁도 협력도 할 수 있다. 정부 눈에 무질서한 투자로 보일지라도 조정은 시장에 맡기면 된다.

이렇게 말하면 “정부는 뭘 하느냐”는 반문이 나올지 모르겠다. 삼성전자를 찾아간 문재인 대통령이 답을 내놨다. “기업의 원대한 목표에 박수를 보내며 정부도 돕겠다”고. 여기까지는 좋다. 궁금한 건 정부가 돕겠다는 게 뭐냐는 것이다. 정부가 ‘기업 주도 빅 푸시’를 돕겠다면 서둘러 치우거나 바로잡아야 할 걸림돌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투자 동기를 약화시키고 있는 법인세율 인상, R&D 세액공제 축소부터 그렇다. 대학의 ‘파괴적 혁신’ 없이 기업이 원하는 인력양성이 가능할지도 의문이다. 최저임금, 근로시간 같은 이슈가 아니어도 적대적 노사관계로는 스마트팩토리 투자조차 어렵다.

해외로 나가려는 투자도 붙잡을 수 있으면 붙잡아야 한다. 이를 위해 영국 프랑스 일본 등은 수도권 입지 제한까지 풀고 있지만, 우리는 40년 가까이 요지부동이다. 신사업 규제개혁도 그렇다. 미국이 사전규제가 아니라 사후규제를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혁신 수용자(2.5%)→초기 수용자(13.5%)→조기 다수자(34%)→후기 다수자(34%)→지각 수용자(16%)로 이어지는, 에버렛 로저스의 ‘혁신 확산 곡선’을 따라간다. 최소한 앞 두 단계에 해당하는 16%의 시장창출 기회를 주겠다는 의미다. 선진국들은 국방은 물론 정부 조달까지 신사업 시장으로 내주고 있다. 이 정도는 돼야 ‘본격 투자’가 일어나지, 규제 샌드박스로는 ‘임시 투자’만 있을 뿐이다.

혹자는 ‘기업 주도 빅 푸시’로 가다가 버블이 터지면 어쩌냐는 우려를 제기할 수도 있겠다. 혁신이 주도하는 자본주의를 하려면 버블이 터져도 시장이 스스로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또한 정부가 할 일이다. 투자를 너무 많이 해 버블이 터진 것이라고 기업을 때려잡을 정부라면 ‘신산업’ ‘혁신성장’이란 말들을 입에 올릴 자격이 없다.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