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우리에겐 어떤 절박함이 있는가
이스라엘이 들어선 가나안(팔레스타인) 지역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었다. 대부분 지역에 돌이 너무 많아 농작물을 기를 수 없었다. 전체 면적의 절반에 이르는 남쪽 네게브 지역은 아예 사막이었다. 북쪽 땅 일부에 물이 흘렀지만,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늪지대였다. 유대인들은 이런 불모지에 나라를 세우기 위해 치밀한 준비작업을 했다. 이스라엘을 건국한 1948년보다 36년 앞선 1912년, 영국이 지배하던 땅에 대학(테크니온공대)을 세웠다. 1921년엔 농업연구소를 설립했다.

초기 개척자들은 물 한 방울이 귀한 불모지에서 굶어죽지 않기 위해 사투를 벌였다. 오랫동안 저장할 수 있는 씨앗 개발과 씨름한 끝에 탄생시킨 방울토마토는 세계인의 식탁에 오르는 인기 품종이 됐다. 건국 이후에는 ‘강소국’ 도약을 위해 첨단과학기술 개발에 도전했다. 인구 800만 명이 조금 넘는 나라에서 6000개 넘는 스타트업을 배출하고, USB와 드론을 탄생시킨 건 그 결실이었다. 시몬 페레스 전 이스라엘 대통령은 회고록 《작은 꿈을 위한 방은 없다》에서 반전(反轉)의 비결을 이렇게 요약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냉혹했다. 성공하거나 아니면 굶어죽는 것뿐이었다.” 기적을 이뤄낸 원동력은 ‘절박함’이었다는 얘기다.

우리나라도 그랬다. 이스라엘과 같은 해에 건국한 한국인들은 돈도, 자원도, 기술도 없었던 척박한 환경을 유대인 못지않은 절박함과 치열함으로 극복해냈다. 지난해 세계 일곱 번째로 달성한 ‘30-50클럽’(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를 넘으면서 인구 5000만 명 이상인 국가) 가입은 감격스러운 성적표다.

이스라엘과 다른 점은 “그만큼 벌었으면 이제 돈을 좀 써보자”는 쪽으로 나라가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 이런 흐름이 더 두드러지고 있다. 노령연금과 출산장려금, 영·유아 보육비, 고교 학자금, 청년 실업수당 등 연령 단계별로 지원금을 확대했다. 병원 치료비 지원도 크게 늘렸다. 문 대통령은 취임 직후 의료보장범위의 대대적인 확대를 골자로 하는 ‘문재인케어’를 발표하면서 ‘국민 건강 지키는 나라다운 나라’를 구호로 내걸었다. “2022년까지 의료비 걱정 없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호언장담도 곁들였다.

일자리가 정부 기대만큼 늘어나지 않자 세금을 동원하는 일자리도 쏟아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공무원 증원 등 일자리에 투입한 예산만 54조원에 달한다. 뭉텅이로 필요한 돈이 하늘에서 떨어질 리 없다. 재원을 늘리겠다고 대기업 위에 ‘초(超)대기업’, 고소득자 위에 ‘초(超)고소득자’ 계층을 떼어내 법인세와 소득세율을 높였다. 문재인 정부의 또 다른 공약이었던 ‘더불어 잘사는 경제’를 실현하는 방안으로 급속한 최저임금 인상과 강제적인 근로시간 단축, 노동조합 활동 보장조치 강화 등의 정책들은 그것대로 밀어붙였다.

그 결과는 우리가 지켜보고 있는 대로다. 기업 투자가 급속하게 위축되면서 성장률이 뚝 떨어지고, 계층 간 소득격차가 확대되는 등 이상신호가 뚜렷해지고 있다. 정부가 당황하고 있음은 대통령의 핵심 경제브레인들을 1년도 안 돼 교체한 사실에서 드러난다. 지난주 ‘제조업 르네상스’에 이어 26일에는 서비스산업 혁신전략을 발표하는 등 나름의 대책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시장 반응은 시큰둥하다. 증권시장은 무덤덤하고, 새 정책에 기대를 거는 기업도 많지 않다. 상황 인식의 절박함, 국정운영에 대한 치열함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게 시장참가자들의 중론이다. 제조업이 르네상스 시대를 열고 서비스산업이 혁신적 발전을 이루기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기업들의 발목에 채운 투자·고용·입지·세제 분야 모래주머니부터 살펴보는 게 순서다. 그것들을 그대로 둔 채 손발만 주물러주고서는 “왜 열심히 달리지 않냐”고 다그치는 식이어선 안 된다. 이스라엘이 ‘황무지의 기적’을 일으키고 대한민국이 전후 잿더미를 딛고 한강의 기적을 이뤘을 때처럼 상황맞춤형 전략과 대책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절박함과 치열함을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지금 뭐 하자는 것이냐”는 시장의 탄식이 좌절로 바뀌어가는 걸 두고만 볼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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