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거리의 악사가 된 파가니니
“야, 파가니니다!” 어느 날 유럽의 한 거리에서 사람들이 이렇게 외쳤다. 천사와 악마, 아름다움과 추함, 화려함과 음습함의 오묘한 이미지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신들린 기교로 전 유럽을 들었다 놨다 했던 그 파가니니가 거리의 악사가 돼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는 게 아닌가! 거리에서 엉터리 바이올린을 켜고 있던 늙은 걸인에게서 정중히 악기를 빌려 연주하는 그의 모습을 본 행인들이 놀라 지른 함성이었다. 늙은 걸인은 그날 인생 최고의 대목을 잡은 건 아니었을까, 아마도 그날의 벌이로 걸인 생활을 졸업했을지 모르겠다.

비슷한 이야기가 우리에게도 있다. 급하게 나오느라 지갑을 두고 온 어느 목사님이 버스 정류장 앞에 엎드린 걸인의 깡통에 있는 동전을 봤다. 너무 급한 나머지 걸인에게 “죄송하지만 동전 좀 빌려줄 수 없겠습니까?” 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엎드려 있던 거지는 “세상에 별 거지 같은 일이 다 있네. 거지한테 돈 빌리는 상거지가 있다니”라며 측은한 듯 동전을 가져가라고 눈짓을 했다. 목사님은 연신 허리를 굽히며 “저 산 위에 있는 교회 목사입니다. 내일 꼭 갚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버스를 탔다.

다음날 그 목사님의 교회 마당에 말쑥하게 차려입은 웬 중년 남성이 찾아와 “어제 버스 정류장에서 목사님께 돈 빌려준 거지입니다”라며 인사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는 “그동안 남들이 던져주는 동전으로 먹고사는 거지 팔자가 내 인생인 줄로만 알았는데 남을 도울 수 있는 희망과 용기를 목사님이 깨우쳐 주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고 한다.

1981년 뉴욕 퀸스 리틀넥의 어느 선술집에서 필자가 겪은 일이다. 맥주 한 병을 시켜놓고 담배를 꺼내 무는데 어떤 백인 거지가 다가와 담배를 청했다. 마침 마지막 개비라 줄 수 없어 좀 기다리라고 해놓고 새 담배 한 갑을 사와 첫 개비를 권했다. 그랬더니 그 자리에서 난리가 났다. 세상에 태어나 이런 대우는 처음 받아본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는 거리에서 남들이 던져 버리는 꽁초나 주워서 피우던 인생을 살았나 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펍에서 만난 그 사람은 부랑자 생활을 접고 뉴욕시의 청소부가 됐다고 한다. 파가니니가 보여준 거리의 연주, 거지에게서 돈을 꾼 목사님, 그리고 내가 권했던 담배 한 개비. 이런 작은 배려와 도움이 힘든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