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업이 살아야 일자리 늘어난다
나이가 들면서 드라마가 점점 재미있게 느껴진다. 누구는 주책이라고도 하고 누구는 노화에 의한 호르몬 변화 때문이라며 놀리기도 한다. 하지만 드라마 속 인물들의 삶에 공감하며 울고 웃는 시간이 그저 좋다. 가끔은 끝난 드라마의 주인공이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지 상상하곤 한다.

드라마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가 이따금 생각난다. 장그래는 비정규직으로 취직해 완생(完生)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청년이다. 결국 바라던 정규직은 되지 못했지만 마음 맞는 선배 오 차장이 창업한 중소기업에서 의기투합하는 모습으로 마무리를 맺었다. 사업하면서 젊은 직원들을 대할 때마다 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미생의 백미는 바둑 대국을 사회생활로 풀어내는 비유였다. 상대를 제압하지 못하면 내가 쓰러지는 바둑의 잔혹함이 그보다 더 냉정한 사회생활과 어찌나 잘 맞아떨어지던지. 일자리 감소 문제가 화두인 요즘 미생에 나온 바둑 격언 하나가 가슴 깊이 다가왔다.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 자기의 말이 산 뒤에야 상대방의 말을 잡을 수 있다는 뜻이다. 바둑에서 자기 말의 생사를 돌보지 않고 무리하게 공격하다 자기 대마를 죽이는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말이다.

일자리 창출을 최우선 목표로 잡고 각종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정부에도 아생연후살타의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본다. 살타(殺他)는 정부 목표인 일자리 창출이고 아생(我生)은 지속 가능한 일자리 창출의 핵심적 주체인 기업과 기업 생태계인 산업으로 대입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산업과 그 안의 기업들이 잘 돼야 일자리가 만들어진다는 의미다.

안타깝게도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 근로시간제도 시행 등을 무리하게 추진하다 보니 기업들 생사가 위태롭고 일자리 창출에도 빨간불이 켜지고 있다. 자동차, 철강, 화학, 제약, 바이오 등 주요 산업 분야에서는 어닝쇼크(실적 충격)가 일어나고 있다. 경제성장률 기대치는 계속 하향 조정되고 있다. 경영 현장에서 느끼는 경기 상황은 이런 수치보다 더 암울하다. 어려운 경영 현실은 고용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준다. 기업이 인건비 부담과 근로시간 단축에 대응해 일자리를 줄이고 있는 것이다.

최근 중소기업중앙회 조사에 따르면 중소기업 10곳 중 8곳가량은 하반기 채용 계획이 없다고 한다. 내국인 근로자를 구하기 힘든 중소기업들이 의존하던 게 외국인 근로자다. 하지만 외국인 근로자 신청도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기업들의 감원 대상 1순위가 청년과 여성이라는 점도 문제다. 기업 처지에서는 적은 인원으로 작업 효율을 높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일 것이다. 양질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노력이 오히려 일자리 감소로 이어지니 이보다 더 아이러니컬한 상황이 있을 수 있을까.

아생연후살타. 살고 죽인다는 말은 다시 생각해도 무섭다. 하지만 바둑은 전쟁의 축소판임을 기억해야 하고, 경영 현장도 전장에서만큼이나 살벌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둑판에서 한 번 잃은 대마는 살릴 수 없다. 지금껏 열심히 키워온 산업과 기업의 경쟁력도 한 번 망가지면 복구하는 데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기업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회적 책임은 일자리 창출이다. 정책 방향 역시 기업이 성장을 통해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고 훌륭한 인재가 다시 산업을 키우며 경제를 발전시키는 선순환 구조를 구축하는 것이어야 한다. 지금이라도 바둑판의 지혜를 되새겨 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