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란 직후 정치가 훼손한 노동시장 유연성
광주 車공장 성공으로 새로운 활로 찾도록
여당, 현대차노조·민노총 동의 이끌어내야

김정호 수석논설위원
[김정호 칼럼] 1998년과 2018년, 그리고 광주형 일자리

광주에 ‘합리적 임금’의 완성차 공장을 세운다는 소위 ‘광주형 일자리’ 논의가 구체화되고 있는 모양이다. 여당이 초당적 지원을 약속했고 광주시와 노동계가 합의했다니 말이다. 광주시와 현대자동차가 협의를 거듭하고 있어서 조건만 맞는다면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변수가 있다. 현대·기아차 노동조합이다. 벌써부터 파업을 불사하겠다며 강력 반발이다. 자신들의 ‘반액 연봉’으로 돌아가는 공장이 세워진다는데 그냥 넘어갈 노조가 아니다. 정부와 여당이 어떻게 대응할지 궁금하다.

1998년 5월이었다. 현대차가 대규모 정리해고에 나섰다. 상황은 심각했다. 외환위기의 한복판에 가동률은 40%까지 떨어졌다. 1만 명이 넘는 근로자들이 강제 휴가를 떠났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던 때다.

정리해고가 법제화된 게 그해 2월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580억달러의 구제금융을 주는 조건이었다. 미국 정부는 친(親)노동 성향의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의 정리해고제 도입 의지를 확인하기 위해 일산 자택으로 데이비드 립턴 재무부 차관보를 보내 ‘면접시험’까지 치렀다. 고용 유연성 확보 없이 한국 경제는 미래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초유의 사태에 정치권도 모두 찬성했다. 그리고 맞닥뜨린 첫 대규모 정리해고 사례였다.

하지만 결과는 엉뚱했다. 8189명을 정리해고하려던 현대차는 277명만을 해고했을 뿐이다. 그것도 절반이 ‘식당 아줌마’들이었다. 그들은 노조가 식당 운영권을 넘겨받아 다시 고용했다. 정리해고는 없었던 셈이다.

기억나는지 모르겠다. 그해 8월 여당이었던 국민회의 노무현 부총재가 울산공장에 내려와 엿새를 머물렀다. 말이 중재이지 회사에 꺼낸 첫마디가 “정리해고하지 않으면 안 되겠는가”였다. 불법 파업 중이던 노조에 대한 공권력 행사는 가로막은 채 말이다. 결국 정리해고는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도 정부와 여당은 노조가 정리해고를 받아들였다며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으니 답답할 뿐이었다.

외신들은 정치권의 개입으로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해친 나쁜 사례라며 한국 경제에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리고 그렇게 됐다.

밀리면 계속 밀리게 돼 있다. 정치권과 정부는 현대차 노조가 파업에 나설 때마다 회사에 조기 타결을 종용했고, 노조는 어김없이 과실을 챙겼다. 그 결과가 제조업 평균의 세 배, 자동차산업 근로자 평균의 두 배가 넘는 임금과 경쟁국의 절반에 불과한 생산성이다. 한국 자동차산업의 경쟁력과 제조업 생산성을 이 지경으로 만든 건 결국 정치권이라는 얘기다. 나라의 고질병이 된 ‘귀족노조’ 탄생의 산파였고, 자동차산업과 나라의 경쟁력 훼손의 주역이었다.

회사가 멀쩡할 리 없다. 이미 20년 전 예고된 자동차산업의 위기다. 회사는 최악의 경영실적을 거듭하고 있다. 그런데도 노조는 불통이다. 신차를 출시하려고 해도 컨베이어벨트를 쇠사슬로 묶고 생산을 거부하는 노조다. 수익이 나는 차종에 인력을 전환 배치하려 해도 불가능하다. 현행법 위반과 인사권 침해는 일상이 돼 버린 지 오래다. 소비자들은 귀족노조 배불려 주기 싫다며 수입차 매장으로 발길을 돌린다. 회사만 답답하다.

광주 자동차공장은 그런 면에서 20년 만에 마련된 돌파구다. 게다가 “대전환기에 있는 자동차산업의 새로운 활로를 만들어보자는 것”이라는 여당의 인식 변화는 괄목할 만하다. 그것도 완성차 업체에서 노동운동으로 뼈가 굵은 홍영표 원내대표의 발언이다. 이해찬 대표도 적극 지원을 약속했다. 지금까지 분위기는 좋다.

그렇다면 여당은 할 일이 더 있다. 현대·기아차 노조는 물론이고 민주노총의 동의를 받아내 줘야 한다. 당사자 합의가 우선이라는 얘기는 하지 말라. 그동안 당사자 원칙이 지켜지도록 도왔다면 노사 갈등이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다. 결자해지다.

광주시와 현대차가 합의한다 해도 노조가 파업에 나서고 민주노총이 ‘촛불’을 내세우면 광주 프로젝트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지방자치단체와 개별 기업이 그걸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악습의 고리를 끊어야 일자리가 생기고, 자동차산업이 살고, 나라 경제가 산다.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완성차 공장을 만들어보자. 해외로 나간 공장도 앞다퉈 되돌아오도록 말이다. 마지막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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