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상실의 고통을 극복하는 법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나이가 들면 죽는다. 병이 들거나 사고를 당해서 세상을 떠난다. 불행한 일이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그 어떤 죽음도 주변 사람들이 고통을 감당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망인(亡人)에게는 죄스러운 이야기일지 모르겠으나 남겨진 사람들의 아픔이 더 클 수도 있으리라. 세상 어떤 것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목격한 것만큼 슬프고 안타까운 일은 없으니 말이다. 아마 살아생전 사랑했던 만큼 더 아플 것이다. 예상치 못한 죽음이라면 겪어보지 못한 만큼 힘들게 된다.

상실의 고통을 덜고자 상담실을 찾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서양에서는 배우자의 죽음이, 동양에서는 자식의 죽음이 가장 큰 스트레스 요인이다. 그런 상실을 겪은 분들의 고통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다. 지병으로 돌아가신 부모의 유품을 정리하지 못하고 매일 울음으로 밤을 지새우는 아내를 설득해 상담을 받기도 한다. 몇 해 전부터는 반려동물을 잃고 ‘펫로스 증후군(pet loss syndrome)’으로 상담하는 분이 적지 않다. 사랑하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결코 인간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최근에는 유명 연예인이나 정치인의 죽음으로 상실감을 호소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인기(人氣) 또는 신망(信望)을 많이 받고 있던 분들의 죽음일수록 더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는 듯하다. 아마도 그만큼 더 가깝게 느껴져서가 아닐까.

상실의 종류는 여러 가지지만 심리적 반응은 비슷하다. 분석적으로 상실은 분노를 일으키며, 그 분노의 화살이 자신에게 향할 때 우울증이 된다. 하지만 모든 상실이 병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모든 죽음을 접한 자들이 고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다면 인류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인간은 오랜 기간 이 극한의 심적 고통을 이겨낼 수 있게 진화해왔다. 우리는 상실을 통해 성장하고 성숙해질 수 있다.

상실은 애도(哀悼)를 통해 치유된다. 애도 반응은 몇 가지 단계로 진행된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목격하면 처음에는 부정하게 된다. 절대 그럴 리 없고 믿을 수가 없다. 마치 당장이라도 일어나 내게 걱정하지 말라고, 슬퍼하지 말라고 말을 걸어줄 것 같다.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내 생각을 눈곱만치라도 했으면 그럴 수 없었을 텐데”라고 말이다. 남겨진 사람은 버림받았다는 분노에 사로잡힌다. 분노는 쉽게 떠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도는 시간에 따라 변한다. 어느 정도 후에는 사랑하는 대상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분노하는 마음과 현실 사이에서 타협이 시작된다. 유품을 정리하고 고인을 추모하기 시작한다. 가슴이 찢어지고 아프지만 그를 보내야 한다는 현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타협의 시기를 잘 극복하지 못하면 우울증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 단계를 지나면 마침내 죽음을 수용하게 된다. 돌아가신 분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고 커다란 갈등 없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상실감은 가슴 속 저 밑바닥에 제대로 자리를 잡고 시간이 갈수록 그 색은 옅어져간다.

애도의 반응은 누구에게나 나타난다. 물론 단계가 바뀌거나 겹칠 수 있지만 시간이 약이다. 자연스러운 진화의 산물이니 슬픈 감정을 몰아내려 애쓸 필요가 없다. 슬픔에서 도망치려다 되레 더 깊은 수렁에 빠지기도 한다. 충분히 슬퍼해야 하고 충분히 아파해야 한다. 그래야 상실을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상실로 인한 슬픔이 인류의 존속과 성장에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그 극복 과정에서 겪는 고통이란 것은 결코 만만치 않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는 우리를 기억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견디기 힘든 삶이라도 살아가야 할 책임과 보람이 있다. 그것이 더 큰 사랑일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