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창] 급변하는 대외환경, 유럽의 선택은
진눈깨비가 몰아치는 독일 베를린의 3월에 봄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지난주 콘라드아데나워재단과 함께한 ‘유럽 싱크탱크 정상회의’는 시종일관 날씨만큼이나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열렸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워 보호무역 색채를 드러내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지지하고 유럽 통합을 조롱함으로써 유럽 엘리트와 정치 지도자들을 더욱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때마침 들려오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장기집권 시나리오는 유럽이 발전시켜 온 보편적 가치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여겨진다. 3일간 계속된 회의는 지난 몇 년 사이에 급변하고 있는 대외환경이 우리만큼이나 유럽인에게 크나큰 도전이 되고 있음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우선 유럽에서 가장 당황스러운 일은 과거 가장 굳건하고 안정적인 관계로 여겨졌던 유럽-미국 관계가 급변하고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트럼프 정부는 여러 차례 통합된 유럽을 대표하는 유럽연합(EU)보다 회원국과의 양자관계를 우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최근 수입 철강과 알루미늄에 관세폭탄 부과 가능성을 발표해 독일을 포함한 EU 회원국을 뒤집어 놓은 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같은 집단방위체제는 쓸모없는 것이고 유럽은 안보에서 무임승차를 하고 있다는 비난을 노골적으로 하고 있다. 영국과 EU 양자가 모두 손해보는 브렉시트 협상은 진흙탕으로 가고 있으나, 트럼프 대통령은 영국이 EU라는 낡은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 영국에는 절호의 기회라는 입장이다. 무엇보다 민주주의, 인권, 법치와 같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한다는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비판이 뼈아프다.

중국의 최근 행보는 유럽에 좌절감을 안겨주고 있다. 유럽은 중국이 개혁·개방정책을 펼친 이후 눈부신 경제성장을 하면서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고, 국제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에 고무돼 있었다. 그러나 10여 년 전부터 중국이 서방이 발전시켜 온 가치체계를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중국 회의론’이 점차 고개를 들었으며, 이번 시 주석의 집권 연장을 위한 헌법 개정과 주석 연임은 회의론을 절망으로 바꾼 결정적 계기가 됐다. 러시아는 유럽의 인접국이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된다. 영국 솔즈베리에서 발생한 러시아인 독극물 사건으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영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아직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 우크라이나 사태와 함께 유럽과 러시아 간 해묵은 긴장관계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고 있다.

상황이 녹록지 않아서일까. 유난히도 가치를 공유하고 마음 맞는 친구끼리 협력하자는 얘기가 많이 나왔다. 미국,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가 어렵다고 하더라도 다른 통하는 친구들과 양자, 다자적 차원에서, 그리고 3대 강국 내 우군들과도 적극 소통하자는 것이다. 유럽 차원의 공동안보방위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해 자주국방을 지향하는 게 절실하다는 것이다. 통상정책에서도 다자적 자유무역 기조를 끝까지 유지하되 만약 미국에 대한 보복이 불가피하다면 전면전보다는 트럼프 지지자의 지역과 산업을 조용히 정밀 타격해 기조를 바꾸지 않고 효과를 거두자는 것이다.

중동부유럽과 공유하고 공감할 거리를 확인한 것도 소득이었다. 상황은 어렵지만 결기가 보였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퍼시 비시 셸리가 말하지 않았던가. 겨울이 오면 봄이 멀리 있지 않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