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가상화폐, 암호화폐, 디지털화폐
‘비트코인 열풍’이 뜨겁다. 주로 얼리어답터(남보다 먼저 새로운 것을 경험하려는 소비자) 사이에 이뤄지던 암호화폐 거래에 가정주부와 학생까지 뛰어들었다. 광풍(狂風)이라 부를 만하다. 주요 금융기관이 비트코인 가치를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여기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됐다. 미국 시카고상품거래소(CME)는 지난 17일 비트코인 선물 거래를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2020년 도쿄올림픽에서 비트코인을 활용해 다양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비트코인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암호화폐 거래소 해킹에 따른 고객 자산 손실, 채굴 사업 사기, 가상화폐공개(ICO) 다단계 사기 등이 잇따른 탓이다. 한국 정부는 부정적 사례에 주목해 ICO를 전면 금지하고 가상화폐에 대한 무분별한 투자를 방지하는 규제를 마련하기로 했다.

그러나 대부분 선진국은 암호화폐를 인정하고 이를 활성화하거나 지원하는 방안을 고민 중이다. 스위스 추크(Zug)시는 암호화폐 관련 규제를 없애면서 수많은 블록체인 전문 기업을 ‘크립토밸리’에 유치해 고용을 늘려가고 있다.

한국 정부나 언론의 암호화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국내에서 일어나는 일부 투기성 암호화폐 구매에 기인한다. 그러나 필자는 암호화폐를 가상화폐란 용어로 부르기 시작한 것부터 부정적 시각을 유도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가상화폐란 단어는 마치 비트코인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허구로 만들어져 의미가 없이 존재한다는 부정적인 인상을 준다. 이는 한국만 예전의 관습으로 인해 쓰고 있는 잘못된 용어다.

실제로 가상화폐는 1990년대 인터넷 초창기에 싸이월드에서 이용됐던 ‘도토리’나 게임에서 쓰이는 게임용 코인 등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우리가 현금으로 살 수는 있지만 실제 사회에선 쓸 수 없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사람들은 이를 진짜 화폐가 아니라는 뜻에서 가상화폐라 불렀다.

하지만 비트코인은 실제 화폐처럼 쓸 수 있다. 사용자 간에 거래할 수 있으며 실제 상점에서 물건값을 치르는 지급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다. 한국에서만이 아니라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사용할 수 있다. 따라서 게임이나 인터넷에서만 통용되는 ‘가짜 돈’이란 뜻을 담고 있는 가상화폐란 용어를 비트코인에 적용해 써선 안 된다.

해외에서는 비트코인을 가상화폐가 아니라 암호화 화폐(crypto-currency)라고 부른다. 필자는 이 글에서 정부의 말을 인용하는 것 외에는 가상화폐 대신 암호화폐라는 용어를 썼다. 이는 기존에 존재하는 동전이나 지폐와 같은 화폐가 아닌 새로운 암호화 기술, 즉 블록체인 기술이 적용된 화폐라는 뜻을 포함한다.

어느 경제학자는 우리가 지금 쓰는 화폐를 ‘신뢰의 표현’이라고 설명한다. 화폐를 주면 받은 사람이 이를 믿고 해당 화폐의 가치에 해당하는 노동력이나 반대급부를 제공할 것이란 상호 믿음이 있을 때 그 화폐에 가치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만일 위조 화폐가 만연하거나 화폐를 발행하는 정부가 가치를 보장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면 그 화폐의 가치는 하루아침에 휴지조각이 될 수 있다. 비트코인과 같은 암호화폐는 블록체인이란 혁신적 보안 기술을 적용해 전 세계 사용자가 서로 신뢰하며 거래할 수 있다. 이를 기반으로 비트코인은 전 세계적으로 믿고 거래할 수 있는 새로운 화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비트코인과 같은 블록체인 기반 화폐를 가상화폐라고 부르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런 용어 하나가 신기술 기반의 혁신적 산업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국도 이제는 가상화폐라는 구시대의 용어를 떨쳐버리고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암호화폐라는 용어를 써야 하지 않을까. 암호화폐라는 용어가 너무 기술적이고 대중적이지 못해 파급력이 떨어진다면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화폐라는 뜻에서 ‘디지털화폐’라는 단어는 어떨까 제안해 본다.

박수용 < 서강대 교수·컴퓨터공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