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현충원과 장충단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켜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6·25 전쟁 중 포항지구 격전지를 찾은 여군 정훈요원이 어린 전사자의 품에서 피에 젖은 수첩을 발견했다. 서울 동성중 3학년 이우근 학생의 편지였다.

이 편지는 끝내 전해지지 못했다. 징집연령(18세)에 미달해 학도의용군이라고 불렸던 14~17세 소년지원병 5만여 명 중 7000여 명이 그렇게 산화했다.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는 이들과 함께 군번도 이름도 모르는 무명용사들이 잠들어 있다. 유골을 찾지 못해 위패만 모신 영령이 10만3000여 위(位), 이들을 포함해 모두 17만2000여 명이 안장돼 있다.

윌리엄 딘 장군 구출 작전 중 8발의 총탄을 맞은 김재현 철도기관사도 말없이 누워 있다. 유관순 홍범도 등 독립투사 묘역과 후손 없는 무후선열(無後先烈)들의 제단도 거기 있다.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 등 국가 원수 4명의 묘소, 육군 중장 신분으로 유언에 따라 사병 묘역에 안장된 채명신 장군 묘도 있다.

이곳은 1955년 개장 당시 6·25 전사자 위주의 ‘국군묘지’였다가 1965년 독립유공자 등을 포함한 ‘국립묘지’로 변경됐고 2006년 ‘현충원’으로 바뀌었다. 묘지 부족으로 1979년 신설한 국립대전현충원에도 제2연평해전과 천안함 피격 전사자 등 8만여 위가 묻혀 있다.

6월6일이 현충일로 지정된 것은 휴전 3년 뒤인 1956년부터다. 이날은 절기상 망종(芒種)으로 고려 때부터 전사 장병들의 제사를 지낸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는 대한제국으로 이어져 1900년 지금의 서울 신당동에 장충단(奬忠壇)을 쌓고 합동추모제를 지냈다. 6·25 나흘 전에도 무장공비에 희생된 장병 등 1664위를 장충단에 모셨다. 집집마다 조기를 게양하고 전 국민이 오전 10시 사이렌 소리에 맞춰 묵념을 올리는 의식도 지금과 같았다.

동작동 현충원은 전쟁통에 장충단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부산 대구 경주 등 후보지를 물색하던 정부가 1953년 지정했다. 1970년엔 남파 간첩 3명이 대통령과 요인들을 암살하려 현충문에 폭탄을 설치하던 중 폭발하는 사고도 있었다.

오늘은 62회 현충일. 문재인 정부는 차관급 부처인 국가보훈처를 장관급으로 승격한다고 발표했다. 나라 밖에서는 6·25 때 100회 출격한 전투조종사 유진 메츠링 미 예비역 대령(93)이 65년 만에 방한해 현충원을 찾는다고 한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