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산책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44) 6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

중국 통일한 수나라가 주도권 노리며 고구려와 충돌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러시아 일본 영국 미국 프랑스 청나라가 벌인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은 조선의 개항과 멸망, 식민지화를 초래했다. 20세기 중반 미국과 소련이 치른 그레이트 게임은 한민족의 분단과 비극적인 6·25전쟁을 몰고왔다. 최근엔 미국과 중국 간에 ‘새 그레이트 게임’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서기 598년, 고구려 영양왕은 말갈병(또는 거란병) 1만을 거느리고 요서지방을 공격했다. 《수서(隋書)》의 또 다른 기사는 이 공격에서 고구려가 해양방어시설을 빼앗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수나라 문제(文帝)는 곧 30만의 수륙군으로 반격했으나 육군은 역병이 창궐해 요하전선을 넘지 못했다. 한
고구려의 요동지방 산성인 백암성. 튀르크(돌궐)와 전투를 벌인 곳이다.

고구려의 요동지방 산성인 백암성. 튀르크(돌궐)와 전투를 벌인 곳이다.

편 래호아가 지휘하는 6000명의 산동수군은 평양성을 향해 출항했지만 폭풍우를 만나 배들이 표몰됐고, 죽은 자가 십중팔구였다고 한다(《수서》). 하지만 기상조건들을 분석하면 장산군도 등에 구축한 해양방어체제에 막히고 고구려 수군의 공격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70년 전쟁의 신호탄 ‘고·수전쟁’
이렇게 ‘고·수(高·隋)전쟁’의 신호탄이 올랐고, ‘고·당(高·唐)전쟁’을 거쳐 신라가 참여한 이른바 ‘삼국통일전쟁’까지 지속됐다. 전쟁의 목적과 진행과정, 결과 등을 보면 몇 단계로 구성된 ‘70년 전쟁’이었다. 한륙도(한반도와 만주 포함)·중국·일본열도·몽골·알타이·중앙아시아가 포함된 유라시아 세계의 질서가 재편되는 그레이트 게임이었다.

유라시아 동쪽은 1세기 이상 분단된 남·북 중국, 몽골 초원의 유연, 동쪽의 패자인 고구려 등 4핵과 그 주변에 백제·신라·왜·말갈·거란 등의 소핵들이 상호작용하면서 다원적인 세력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동아지중해의 중핵인 고구려는 흥안령(興安嶺)산맥, 화북평원, 대초원, 실크로드로 이어지는 북방무역망과 일본열도·제주도·양자강 유역의 남조 정권과 이어지는 해상무역망을 유기적으로 운영했다. 그런데 6세기 중반부터 북중국이 분열되고, 몽골과 알타이지역에서는 튀르크(돌궐)가 유연을 멸망시킨 뒤 유목제국을 건설했다. 이어 6세기 말에 동아시아는 전 중국을 통일(589년)한 수나라와 튀르크 제국, 고구려의 삼각구도로 재편됐다(윤명철, 《고구려 해양교섭사연구》, 1994).
중화 종주권 탈환에 나선 수나라
시대에도 숙명이 있고, 국가에도 숙명이 있다. 400년 만에 전 중국을 장악한 수나라는 정치·경제적 통일을 추진하면서 대제국을 건설하고, 중화 종주권을 탈환할 숙명이 있었다. ‘튀르크 1제국’ 또한 만리장성을 넘을 수밖에 없는 유목민의 경제적 숙명이 있었다. 중국지역의 분열과 북방세력 간 갈등을 활용하던 고구려도 신흥 강국들과 경쟁·대결이 불가피했다. 숙명을 피할 수 없으면, 이기는 수밖에 없다.

수나라 양제(煬帝)는 즉위하자마자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지정학적인 수순대로 남쪽의 유구(대만)를 점령했고, 임읍(북베트남)을 공격했으며, 적토국(말레이반도) 등 10개국과 교통망을 정비했다. 그뿐만 아니라 서쪽으로 청해성 일대의 토욕혼, 중앙아시아의 소구드 지역과 우호관계를 맺었다. 이때 사할린 지역에 살던 유귀가 사신을 보내왔다. 내부적으로는 난공사 끝에 2000㎞ 가까운 대운하를 완공했다. 내륙 수로망을 해양실크로드 무역권과 연결했으며, 고구려전을 준비하는 군사적인 용도로 이용했다. 실제로 610년 7월 양자강과 회하 이남 지역의 인부와 선박을 동원해 군량미를 북경 일대인 탁군(郡)으로 운반했다. 또 강남에서 적함(赤艦), 루선(樓船) 등 수만 척을 건조해 이동시켰다. 주력 전선인 오아(五牙)는 누(다락)가 5층이고, 전사 800명을 태울 수 있었다.
결전 직전의 숨가쁜 합종연횡
강력했던 튀르크 제국은 수나라의 ‘이이제이(以夷制夷·divide and rule)’ 정책에 속아 분열됐다. 서튀르크(583년)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성장했고, 한때 고구려와 혈투를 벌인 동튀르크는 이미 수나라에 항복한 상태였다. 한편 완충지대에 있던 거란은 수나라와 대결에 들어갔고, 말갈은 대부분이 고구려의 전력이 됐다. 고구려는 국제질서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시도를 했고, ‘거수지책(拒守之策)’ 즉 방어정책을 펴기로 했다. 군사를 정비하고, 식량을 비축했으며, 심지어는 수나라의 노수(기계활제작공)를 매수하기도 했다.

고구려는 우호적인 왜국에 사신단과 승려들을 집중적으로 파견했다. 혜자는 실권자인 쇼토쿠(聖德) 태자의 스승으로 정치개혁에 참여했고, 담징 같은 승려들은 불사(佛事)를 벌이고, 그림을 그렸다. 영양왕은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사찰인 아스카사(寺)를 세울 때(605년) 황금을 300냥 기증했다. 반면 불필요한 남진정책을 벌여 대장군 온달이 아차산성 전투에서 전사했다(590년). 위기감을 느낀 신라는 수나라에 ‘걸사표(乞師表·군사를 청하는 글)’를 보냈고, 백제 역시 향도 역할을 제안했으며, 공격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전쟁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 기억해주세요
동국대 명예교수
사마르칸트대 교수

동국대 명예교수 사마르칸트대 교수

유라시아 동쪽은 1세기 이상 분단된 남·북 중국, 몽골 초원의 유연, 동쪽의 패자인 고구려 등 4핵과 그 주변에 백제·신라·왜·말갈·거란 등의 소핵들이 상호작용하면서 다원적인 세력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6세기 말에 동아시아는 전 중국을 통일(589년)한 수나라와 튀르크 제국, 고구려의 삼각구도로 재편됐다. 400년 만에 전 중국을 장악한 수나라는 정치·경제적 통일을 추진하면서 대제국을 건설하고, 중화 종주권을 탈환하려 했고 고구려도 신흥 강국들과 경쟁·대결이 불가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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