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사시·로스쿨 따로 차린 법조인협회
특정 상대와 비슷한 이름을 짓거나 흉내를 내서 그 상대를 조롱하는 것은 패러디의 오래된 기법이다. 북한을 풍자하기 위해 북한의 대남선전 매체인 ‘우리민족끼리’와 같은 이름의 홈페이지를 만들고 내용은 북한에 비판적인 콘텐츠로 채우는 식이다.

이 생각이 떠오르게 한 것은 최근 법조계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대한법조인협회’(대법협)는 20일 서울 역삼동 대한변호사협회 회관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활동을 공식 시작했다. 단체의 이름이 낯익다 싶어 찾아 보니 지난해 9월 출범한 ‘한국법조인협회’(한법협)와 거의 판박이다.

이 일의 배경에는 사법시험 출신 변호사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출신 변호사 간의 갈등이 있다. 앞서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은 대한변협이 사시 존치 운동을 벌이는 것에 반발해 지난해 따로 한법협을 꾸리고 독자적인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이번에 사시 출신 변호사들이 대법협을 만들고 한법협과 정확히 반대되는 활동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대법협은 이날 창립총회에 앞서 배포한 자료에서 단체의 주요 활동이 사시 존치 운동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사시 존치 운동을 하는 변호사들이 실제로 한법협을 풍자하기 위한 목적으로 단체 이름을 이렇게 지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서로에게 숱한 인신공격과 비난을 퍼부은 점을 떠올려 보면 무리한 추측은 아닐 것이다. 한 변호사는 “사시 출신과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은 이미 지켜야 할 선을 넘었다”고 말했다.

한국보다 6년 먼저 로스쿨을 도입한 일본은 어떨까. 일본은 ‘사시와 로스쿨 출신 변호사가 이원화돼 있다’고 알려진 대표적인 나라다. 그런 일본에서도 이런 민망한 싸움은 벌어지지 않았다. 일본 사정에 밝은 한 변호사는 “변호사 세대 간 갈등은 일부 있지만 사시·로스쿨 출신이 변호사 단체를 따로 꾸리는 정도의 큰 갈등은 없다”고 전했다. 실제로 도쿄에는 세 개의 지방변호사회가 있지만 이는 지역과 역사에 따른 구분일 뿐 사시·로스쿨과는 관계가 없다. 한국 재야 법조계는 어떤 나라에서도 일어난 적 없는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