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규제의 자기지속성을 허물어라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공개 끝장 토론을 벌일 정도로 규제논란이 다시 뜨겁다. 국가경제의 활력을 옭아매는 규제의 폐해는 새삼 다시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불필요하고 부당한 규제를 정비해야 한다는 원론에 반대하는 사람도 없다. 역대 정권은 모두 나름대로 규제 정비에 노력해 왔는데도 왜 규제는 끊임없이 문제로 제기될까.

규제는 결국 자유의 제한이다. 자유 존중 역사가 일천하기 때문인지 우리나라에는 개인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하는 규제가 적지 않다. 예컨대 물살이 센 물가는 으레 수영금지 구역이다. 그런데 같은 경우 선진국은 센 물살이 위험하니 수영하더라도 조심하라고 안내한다. 같은 상황에서 선진국은 안내하는 사안을 우리는 금지한다. 개인이 책임질 일까지 정부가 간섭하니 쓸데없는 규제가 많을 수밖에 없다.

규제가 일단 생기면 정부는 모든 사람이 이 규제를 따르도록 통제하는데, 규제 내용에 따라 사람들의 득실은 엇갈린다. 예컨대 대형 할인마트의 휴일 개장을 제한하는 규제는 할인마트에 불리하지만 골목상권은 반색한다. 그러므로 규제의 타당성은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를 벗어나 그 틀이 만들어내는 사회경제생활에 대한 객관적 평가로 판단해야 한다.

규제에 대한 논란은 그 규제로부터 피해를 당하는 집단의 불만에서 시작된다. 많은 사람들이 불만에 동조하면 논란은 점점 증폭된다. 규제가 처음부터 잘못 책정됐거나 책정 당시엔 합당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진 새로운 여건에 맞지 않게 됐을 경우 논란은 커지게 마련이다.

부당한 규제라도 도입 당시에는 명분이 뚜렷하다. 다만 시행 과정에서 의도와 다른 부작용이 드러나면서 도입 명분이 무색해졌을 뿐이다. 부당 규제가 그때그때 정비된다면 논란이 일어날 턱이 없다. 규제가 끊임없이 사회문제화하는 것은 그 부당한 내용 때문이기도 하지만 불필요함이 드러났는데도 끈질기게 스스로 생명을 이어가는 규제의 자생적 속성 때문이다.

특정 규제의 좋고 나쁨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그 시행을 실제로 담당하는 관리들이다. 이들의 평가는 해당 규제의 유지 또는 폐지를 판단하는 데 매우 유용한 정보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부당규제를 가려내 폐지를 건의할 유인이 없다. 오히려 그렇게 하다가는 현행 규제로 이익을 누리는 기득권 세력의 낙마공작이나 부를 뿐이다. 차라리 잠자코 규제시행의 권력이나 누리는 것이 더 낫다. 기득권 집단과 규제담당 관료가 서로 짜지 않고서도 음성적 연대를 이루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니 규제 철폐의 사회적 요구가 웬만큼 크지 않다면 그 규제는 대체로 살아남는다.

지금대로라면 일단 시행된 악성 규제는 계속 유지되기 마련이다. 불편하지만 그런대로 견딜 만하고, 작심하고 빼자니 번거로워 그냥 지내는 ‘손톱 밑의 가시’다. 그러나 이런 작은 가시가 하나 둘 모이면 못 느끼는 사이에 ‘암덩어리’로 돼버린다. 그래서 역대 정부는 빼낼 가시의 숫자를 목표로 정하고 수시로 규제 폐지의 건수를 실적으로 발표해 왔다.

그러나 규제는 사회생활의 틀이다. 규제정비의 실적을 폐지 건수로만 보면 옥석을 가리지 못하기 일쑤고 자칫 정당한 규제까지 폐기한다. 지난번 세계 금융위기를 자초한 금융 자유화 광풍이 좋은 예다. 규제와의 전쟁을 제대로 치르려면 무엇보다도 부당 규제가 스스로 부당함을 드러내도록 만들어야 한다.

모든 공무원에게 직무를 수행하면서 관리한 규제의 성과를 정기적으로 실명 평가하고 유지여부를 건의하도록 의무화하면 어떨까. 특정 규제가 사회적 논란을 유발할 때마다 해당 규제에 대한 모든 담당관의 과거 실명 평가는 그 성실성을 점검받기 마련이다. 이 점검 결과를 승진, 승급 결정에 반영한다면 사실을 은폐, 오도하는 평가 건의는 많이 사라질 것이다.

관리들의 유인구조를 이렇게 개조하면 규제담당관과 기득권 집단 간 야합 토대가 무너지므로 나쁜 규제의 자생력은 현저히 약해질 것이다. 규제의 자기지속성을 허물어야 부당규제는 퇴치된다.

이승훈 < 서울대 경제학 명예교수 shoonlee@sn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