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에르메스, 헨리베글린, 델보
왼쪽부터 에르메스, 헨리베글린, 델보
세계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핸드백 브랜드 ‘델보’. 1829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탄생한 델보는 ‘벨기에의 에르메스’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이 브랜드 대표 상품인 ‘브릴리언트 백’ 등에는 가죽 재질에 따라 최저 250만원, 최고 3500만원 가격표가 붙어 있다. 델보 핸드백의 특징은 겉으로 봐선 무슨 브랜드 제품인지 알기 어렵다는 점이다. 로고가 찍혀 있지 않아서다.

그래도 아는 사람들은 다 알아본다. 벨기에 왕실에 가죽 제품을 공급했고 전 세계 패션 피플의 사랑을 받는 고급 명품이란 사실을. 지난달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에 한국 첫 단독 매장을 냈는데, 한 달 새 당초 목표보다 68% 많은 2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로고 없는 명품, 소리 없이 강하다

델보의 사례처럼 브랜드를 감춘 ‘로고 없는 명품’이 승승장구하고 있다. 현대백화점에 따르면 로고를 잘 드러내지 않는 고가 브랜드들이 올 들어 명품업계 평균을 훌쩍 뛰어넘는 높은 성장률을 보였다.

‘보테가베네타’의 지난 1~10월 매출은 작년 같은 기간보다 14.7% 늘었고 ‘발렉스트라’는 16.2%, ‘헨리베글린’은 15.8% 뛰었다. 이 기간 명품 전체 매출 증가율이 6.2%에 그친 것과 대조적이다.

국내 명품시장 규모가 연간 5조원을 넘어서면서 ‘루이비통’ ‘구찌’ ‘펜디’ ‘코치’ 등 브랜드 로고를 뚜렷하게 드러내는 브랜드는 희소성이 예전 같지 않은 상황이다.

김재호 현대백화점 해외패션 바이어는 “특정 브랜드의 로고나 상징보다 가죽이나 재질을 우선적으로 고려해 구매하는 성향이 강해지고 있다”며 “유행에 흔들리지 않는 심플한 디자인의 명품에 대한 반응이 뜨겁다”고 전했다. ‘버킨 백’ ‘켈리 백’ 등 로고 없이 깔끔한 디자인을 내세우는 ‘에르메스’는 올 상반기 경기 침체로 허덕이는 유럽에서조차 매출이 14% 늘었고 아시아 성장률은 더 높았다.

컨설팅회사 베인앤컴퍼니는 “로고가 화려하게 들어간 상품을 누구보다 선호했던 중국 부유층조차 이젠 로고를 드러내지 않은 고급스러운 상품을 찾고 있다”고 분석했다.

●신개념 명품족 ‘노노스’ 확산
로고 없는 명품을 선호하는 소비계층을 ‘노노스(nonos)’라고 부른다. 노노스는 ‘노 로고, 노 브랜드(no logo, no brand)’의 줄임말. 프랑스 패션정보회사 넬리로디가 만든 신조어로, 겉에 보이는 로고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의 스타일을 중시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노노스의 확산에 발맞춰 명품업체들이 상품에서 로고의 비중을 줄이는 일종의 디브랜딩(debranding)에 나서는 사례 또한 늘고 있다.

‘루이비통’의 경우 올가을·겨울 패션쇼에서 이 브랜드의 상징인 다미에(바둑판 무늬)나 모노그램(LV 로고)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2009년 이후 성장이 둔화한 루이비통이 차별화된 스타일을 원하는 소비자를 공략하기 위해 변화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셀린느’ 역시 한때 로고를 무늬로 썼던 것과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크기의 로고를 도장으로 찍는 등 상표를 부각하지 않는 추세다.

삼성패션연구소는 최근 ‘노 로고 시대가 왔다(It’s time for No Logo)’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노 로고 명품이 뜨는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분석했다.

①명품을 착용하더라도 명품임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소비자가 늘었고 ②대중의 취향에 상관없이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에 지갑을 여는 ‘에고(ego) 소비’가 확산했으며 ③로고보다 품질, 디자인, 실용성을 따지는 ‘가치 소비’가 강조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과시용 아닌 ‘특별함’에 아낌없이 투자

다른 한쪽에선 로고 없는 명품의 인기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과시형 소비일 뿐이라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국내에서 인기를 끄는 노 로고 브랜드만 봐도 기존 유명 브랜드에 비해 가격대가 훨씬 더 높은 편이다. 수십만원대 제품을 일부 내놓는 유명 명품과 달리 수백~수천만원에 이르는 최고급 가죽 제품에 주력하는 특징을 보인다.

삼성패션연구소는 “국내의 노노스는 실용성과 개성을 추구한다는 본래의 의미에서 다소 변질된 소비자 집단”이라고 꼬집었다.

명품시장이 커지면서 기존 명품 브랜드의 희소성이 계속 떨어지자 더 귀하고 값비싼 이른바 ‘초명품(超名品)’을 찾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임현우 기자 tard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