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STX가 남긴 숙제
강덕수 STX 회장의 ‘샐러리맨 신화’가 기로에 섰다. 자금난 때문에 지주회사인 (주)STX를 비롯 STX조선해양, STX중공업 등이 자율협약을 신청하고는 금융회사들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협력사 연쇄 도산과 같은 경제적 파장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큰 만큼 STX 계열사들의 자율협약 신청을 채권단이 받아들일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그렇게 되면 채권단 지원을 통해 자금 경색의 숨통이 트이겠지만, 강력한 구조조정 요구가 뒤따를 게 자명하다. 강 회장의 지배력 약화도 피하기 어려운 수순이다.

강 회장은 동대문상고를 졸업하고 1973년 쌍용양회 평사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젊은 시절부터 타고난 성실성과 꼼꼼한 일처리 솜씨를 인정받았다. 쌍용그룹 기획조정실로 옮겨 재무와 기획 일을 주로 맡던 그는 20년 만인 1993년 쌍용중공업 이사로 승진했다. 2000년 말 회사가 법정관리(기업회생절차)를 거쳐 외국계에 인수된 뒤엔 대표이사로 발탁됐다.

밀려나는 ‘샐러리맨 성공신화’

강 회장은 2001년 일생일대의 승부수를 던졌다. 전 재산 20억원을 들여 회사 지분을 인수해 사명을 STX로 바꾸고 오너 경영인으로 변신했다. 그의 나이 51세 때다. STX는 이후 공격적 인수·합병(M&A)을 거쳐 불과 10년 만에 재계 순위 12위의 기업집단(공기업 제외)으로 급성장했다.

하지만 공격적 M&A 경영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경기 침체 소용돌이 속에서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해운 업황은 곤두박질쳤고, 후방 산업이자 그룹의 핵심인 조선업도 동반 부진에 빠지는 불운이 찾아왔다. 결국 채권단에 기댈 수밖에 없게 됐다. 이 때문에 경기민감 업종의 특성을 충분히 고려한 채권단 의사결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에도 또 다른 ‘샐러리맨 신화’에 금이 갔다. 윤석금 웅진 회장이다. 학습지 세일즈맨으로 시작해 재계 순위 30위권의 대기업을 일군 윤 회장이지만, 지주회사인 웅진홀딩스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그의 신화는 빛을 잃고 있다.

저간의 사정을 들여다보면 사업 운이 따르지 않은 측면도 적지 않다. 그렇다고 STX와 웅진을 두둔하거나 변호할 생각은 없다. 기업과 기업인은 과정이 아니라 결과로 말해야 한다는 점에서, 모든 경영 판단에 대한 책임은 경영자와 주주, 채권자들이 져야 할 몫이다.

신생 대기업 없어진 30년

그렇지만 이제 갓 선진국 문턱에 들어선 한국의 기업 생태계 관점에서 보면 두 회사의 곤경은 전혀 다른 차원의 숙제를 던지고 있다. 1980년대 이후 한국은 경제 전반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새로운 제조 대기업 성공 모델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벌써 30년이 넘었다.

삼미, 한보, 진로 등도 한때 승승장구했지만 짧게는 수년, 길어도 10년 남짓 만에 뒤로 물러났다. 어느 곳도 글로벌 경쟁력과 규모의 경제를 함께 갖춘 삼성, 현대자동차, LG, SK의 언저리에도 가지 못했다. 몇몇 인터넷 기업들이 약진했고 바이오 쪽에서도 성공 사례가 있지만 글로벌 시장 지배력과 성장 잠재력에선 아직 의문부호가 따라붙는다.

건강한 산업 생태계를 일궈내려면 새로운 제조 대기업이 계속 출현하고, 이들이 안정적인 성장을 일궈가야 한다. 그래야 좋은 일자리를 꾸준히 창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내부 경쟁을 통해 글로벌 산업패러다임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은 삼성, 현대차 이외의 대안이 없는 위기 상황을 30년째 이어오고 있다. 양극화와 경제력 집중의 문제를 넘어 우리가 풀어야 할 진짜 숙제다.

김수언 산업부 차장 sookim@hankyung.com